성수에서의 점심시간의 모습
점심시간은 귀하다. 누군가에게는 맛난 밥을 먹는 시간, 누군가에게는 신나게 수다 떠는 시간,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낮잠을 자는 시간, 누군가에게는 가로수 아래를 여유롭게 산책하는 시간이다. 모양새가 어떻든 점심시간이 누구에게나 소중한 시간임은 틀림이 없다.
내게 점심시간은 잠시간 딴생각이 허락되는 자유의 시간이다. 뭘 먹느냐보다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생각의 주제는 보통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에 따라 주어진다. 대화의 주제는 혼자 오롯이 끌고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래서 내게는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 어떤 이야기들을 상 위에 올리는 사람인가가 내 점심시간의 생각 가지들을 결정하므로. 그래서 나는 무엇을 먹느냐의 사안에 대해서 대체로 무심하다. 다만 새로운 식당에 가기를 좋아한다. 새로운 공간, 새로운 음식은 내게 동행인들의 대화에서 슬쩍 탈주할 수 있도록 작은 자극이 되어준다. 때문에 때때로 음식이 물려서가 아니라 대화 주제에 질려서 새로운 식당을 가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나의 은밀한 내적 도주.
이번 성수 팀과의 점심시간은 어떨까? 여자 넷이 성수에 떨어졌는데. 팀원들이 점심시간에 무엇을 바랄지 궁금한 한편 맘 속 깊은 곳은 평온했다. 그게 무엇이든 나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딴생각이라는 탈주로는 언제나 열려있다.
새로운 곳에 왔으니, 주변 탐색에 욕심이 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했고, 함께 있는 동료들에게도 그랬다. 성수동은 크고 작은 식당들이 즐비한 동네였다. 우리는 프로젝트룸에서 가까운 식당부터 차근차근 음식 맛을 보러 다녔다. 마침 이전에 근처에서 프로젝트를 했던 동료들이 정리해 보내준 식맛집 리스트도 있었다.
유동 인구가 젊고 주말 나들이를 위한 곳이라 그런지 정갈한 한식당보다는 대체로 작고 귀여운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나 일식당이 많았다. 식대가 저렴하지는 않았지만 아기자기한 공간에서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있었다. 잠시나마 업무에서 벗어나 주말을 즐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메뉴판을 둘러보며 어떤 음식이 나올지 상상해 보는 순간들도 좋았다.
성수는 만만한 동네가 아니었다. 길 모퉁이 구석구석까지 카페며 식당이 옹송그려 들어차있는 동네였다. 매일 다른 곳에서 다른 걸 먹어도 새로운 식당이 끝이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나도 이 동네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겠다 싶었다.
여행이 주는 설렘은 실재한다. 하지만 매일매일이 여행인 인생을 우리는 역마살이라는 악독한 기운이 낀 기구한 운명으로 묘사한다. 성수에서의 맛집 탐방 점심시간이 계속되자 기력이 쇠해감을 느꼈다. 월급 통장의 잔고도 빠르게 소진되어 가고.
우리는 구내식당을 가보기로 했다. "외부인 환영"이라는 입간판이 인도하는 대로 쫓아 들어갔다. 지하에 인근 직장인들이 와글거리는 구내식당이 있었다. 식권 10장을 사면 1장이 무료, 식권 결제는 현금만 가능. 식판을 들고 줄을 섰다. 여의도에서의 프로젝트 때가 떠올랐다. 점심을 늘 고객사 구내식당에서 먹고 산책하거나 얼른 돌아와 휴식하고는 했는데. 추운 날이면 주머니에 손을 푹 쑤셔 넣은 채로 종종걸음으로 산책을 했었다. 강 옆이라 바람이 차다는 호들갑과 함께.
구내식당에 나온 찬은 6종 정도였는데, 고기반찬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막상 담을 게 몇 가지 없었다. 대부분의 반찬에 어떻게든 조각 고기나 소시지 등 육류가 섞여 있었다. 먹을 게 없네... 나는 내가 반찬투정을 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여겨왔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고기 부스러기들을 슬슬 피해 헤짚으며 양파나 양배추 따위를 건져 올리며 생각했다. 내일은 바지락 칼국수 먹으러 가자고 해야지. 그리고 적당히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