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학의 태동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시칠리아의 동부도시 시라쿠사. 참주정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도래했지만 여전히 혼란은 말도 못했다. 재산권 소송이 줄을 이었고 법정은 시끄러웠다. 이때 코락스(Corax)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좋은 말로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문제를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논점을 설명하고 여담도 해가면서 사람들을 설득해나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서론-서술-논증-여담-결론 식으로 레토릭의 주요 규범 체계를 선구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서론-본론-결론 식의 글쓰기를 마치 선험적으로 아는 것처럼 당연시하지만 2,50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코락스에게 어느 날 티시아스가 찾아왔다. 수업료를 내고 설득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티시아스는 더이상 코락스에게 배울 것이 없어 하산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수업료는 내지 않았다. 코락스는 사례금을 내놓으라며 티시아스를 고소했다. 두 사람이 재판관들 앞에 섰다.
티시아스: 코락스 당신은 내게 무엇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지요?
코락스: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술이지.
티시아스: 만일 내가 당신한테 그 기술을 제대로 배웠다면 이번 소송에서 이길테니 당신한테 사례금을 줄 필요가 없지요. 만일 진다면? 당신이 내게 설득의 기술을 제대로 가르쳐준 게 아니니 이 또한 돈을 줄 필요가 없어요. 어떤 경우든 나는 당신에게 돈을 줄 이유가 없어요.
코락스: 이봐 티시아스. 만일 자네가 이번 소송에서 이긴다면 나는 자네에게 설득의 기술을 제대로 가르쳐 준 것이니 돈을 받아야겠지. 만일 내가 이 소송에서 이긴다면? 그때도 돈을 받아야겠지. 왜냐하면 내가 소송에서 이겼으니까. 어찌 됐든 나는 무조건 돈을 받는거야.
듣다 보니 머리가 아파진 재판관들은 이렇게 말하고 재판을 끝냈다고 한다. “못된 까마귀에 못된 알”(Kakou korakas kakonoon) ‘코락스의 딜레마’로 불리기도 하는 이 유명한 에피소드는 코락스를 수사학의 창시자로 알리고 있지만, 코락스와 티시아스라는 인물 자체는 실존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고르기아스(Gorgias)는 100세 넘게까지 장수한 것으로 문헌에 정확히 기록된 인물로, 플라톤의 저서인 ‘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와 레토릭으로 대적하는 1세대 소피스트이자 수사학의 대가였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이데아를 추구하는 철학자답게 수사학에 적대적이었다)이 쓴 책인지라 설전의 결과는 뻔하였지만. 역시 시칠리아 출신인데 아테네에 외교관으로 와서 한 연설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아테네 사람들은 그가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을 정도라 한다. ‘헬레네 찬사’ 등 고르기아스의 웅변 사본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고르기아스는 구어(口語) 아니면 시(詩)라는 형식밖에 없던 시절에 오늘날 우리가 산문이라 부르는 것을 발견했으며, 대조법과 병행법을 강조했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그를 이런 말을 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나는 내 형제나 다른 의사와 함께 약 먹기를 거부하거나 수술을 받지 않으려 하는 병자의 집에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 그리고 의사가 아무리 간청해도 소용없을 경우 나는 수사학이라는 기술만으로 병자를 설득시키곤 했다. 그리고 고르기아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의사와 수사학자를 놓고 군중들 앞에서 의사를 뽑으라고 하면 수사학자를 의사로 뽑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수사학이 태동하던 시절의 두 에피소드는 레토릭의 위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수사학과 레토릭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인 선입견이 실로 오랜 역사를 이어왔다는 것도 말해준다. 사람들은 레토릭의 힘에 자주 승복하면서도, 바로 그 이유로 레토릭을 두려워하고 경멸하기까지 했다. 그 대표가 바로 민주주의를 중우 정치로 바라봤던 플라톤으로, 그는 수사학과 수사학 교사들인 소피스트를 비판했고 수사학을 ‘일종의 아첨’으로 바라보았다. 플라톤의 이런 시각은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