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토릭으로 뉴스읽기1

언론에 대한 불신

by Editor M
진정한 삼단논법과 사이비 삼단논법을 가려내는 것이 변증학의 역할이듯,
진정 설득력 있는 것과 설득력 있게 보이는 것을 구분하는 일이
수사학의 역할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16쪽

지금까지 레토릭이 설득의 기술이고, 설득력 있게 쓰고 말하는 법에 관한 학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 대한 당시 세간의 비판을 의식했는지 “수사학”의 첫머리에서 ‘설득력 있는 것’과 ‘설득력 있어 보이는 것’을 구분해놓았다. 수사학이 화자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청자와 독자들의 눈을 밝혀 진짜와 가짜, 거죽과 알맹이, 말로서의 말과 행위로서의 말을 구별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바로 이 글에서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비록 멋진 레토릭을 구사하거나 설득력 있게 말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누군가가 -특히 권력을 가진 자가- 설득력은 없는데 ‘설득력 있게 보이는’ 레토릭을 구사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데 필요충분한 정보나 의견을 누구나 고루 공유하는 민주주의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공유를 매개하는 것이 언론이다. 언론이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 이어 제4부(the fourth estate)로 불리는 이유이다. 그런데 정보나 주장은 결국 언어, 즉 레토릭을 통해 전달될 수밖에 없어서 언론은 늘 난무하는 레토릭들과 씨름해야 한다. 오히려 레토릭과 제대로 샅바싸움을 하지 않는 게 문제다. 흔히들 언론을 향해 ‘있는 그대로만’ 전달해달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레토릭으로 가득 차 있고 거기에는 설득력 있는 레토릭도 있지만 ‘설득력 있게 보이는’ 레토릭도 많다. 그래서 누군가의 ‘설득력 있게 보이는’ 레토릭을 –최대한 가치중립적인- 레토릭으로 바꾸어(convert) 전달하는 것도 언론이 할 일이다. 권력이나 이해관계자는 결국 자신에게 유리한 레토릭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화자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그대로 전달하는 것도 언론의 역할이다. 그런데 화자의 레토릭에 함정이 있어 이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제대로 된 사실을 알리지 못할 때는 경고음을 울리고 다른 레토릭으로써 함정을 메워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그러나 지금은 언론 불신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중장년층보다 미디어 노출 연식이 짧은 MZ세대, 90년대 생이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다음은 한겨레신문에 실린 “부도 신분도 대물림 ‘갇힌 세대’…90년대생 분노 안 할 수 있나”라는 기사(2021년 6월 12일자 커버스토리)에 나오는 90년대 생의 목소리이다. 90년대생,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각각 한 권씩 펴낸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이길보라 영화감독, 임명묵 작가 세 사람이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이 기사를 보면 90년대생이 인식하는 언론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다.


임명묵: “지금 논의되는 공정이 껍데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인국공 사태) 등 최근 공정성 논란들이 논리적, 철학적으로 공정의 가치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만큼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줘’라는 감정적, 정서적인 요구에 가깝다. 우리가 너무 힘들고 불안한데, 기존 시스템은 못 믿겠으니 취업시험이라도 수치화해서 예측 가능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단어로 ‘공정’을 찾은 것이다. 정치권과 언론이 ‘얘들은 공정을 좋아하는구나’라고 취급해 ‘공정 세대’란 이름을 붙이면서 확대재생산된 거 같다. ... (중략)...

―90년대생 내부의 젠더 갈등은 왜 시작됐다고 보나?

이길보라: “어렸을 때부터 누구나 평등하다고 배웠다. 현실은 여성과 남성 문제에서도 책과 달랐다. 젠더 불평등 문제에 대해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키워온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생 사이에 젠더 갈등이 심하다고 하는데 이대남, 이대녀 문제만이 아니다. 그 위로 올라가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더 많은 여성들이 존재한다. 90년생이 도드라져보이는 것뿐이다. 여성들이 마이크를 쟁취하고, 발언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언론이 이대남, 이대녀를 자꾸 얘기해서 더 갈등이 심해지는 부분도 있다.” ...(중략)... -

최근 ‘이준석 현상’도 ‘2030 여성차별은 현실에 없는 것’이라는 식의 반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을 부추긴 게 동력이 됐다. 90년대생 세대의 젠더 갈등이 악용되는 셈이다. 접점은 없을까?

강남규: “언론에서 젠더 갈등을 남성과 여성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져 진영 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우리 주변을 보면, 실제로 그런가? 일부 온라인 남초 사이트에서 남녀가 동등한 세력이 갈등한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언론이 이를 그대로 보도하면서 생기는 착시 현상인 것 같다. 어느 정도 젠더 갈등이 실존하는 것은 맞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글쎄… 그럴듯한 의견을 내보라고 하면, 당장은 패스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것이 사회 이슈를 깊이 고민해 책으로 써낸 90년대생의 언론에 관한 생각이자 정서다. 나도 20년 넘게 저널리스트로 일했지만, 일찍부터 소셜미디어에 친숙한 젊은 세대가 기성 언론을 이렇게까지 중요한 플레이어로 인식하고 있었나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이 나눈 얘기를 들어보면 핵심은 다른 곳에 있다. 이들의 주장은 ‘언론이 (특정 레토릭과 토포스에) 주목해서’, ‘언론이 이름을 붙여서’, ‘언론에서 ~것처럼 보이게 해서’, ‘언론이 그대로 보도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던 대로 언론이 거르지(게이트키핑) 않고 그대로 보도하는 것도 이들은 분명히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이들 90년대생 세 사람의 주장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차지하고라도, 결국 이들의 불만은 언론의 레토릭에 대한 것이다. 언론의 활동은 결국 전송된 언어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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