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토릭으로 뉴스읽기2

저널리즘과 수사학은 닮은꼴

by Editor M

종종 언론과 정치권은 한데 묶여 1+1 상품처럼 취급되곤 한다. 나중에 자세히 들여다보겠지만 정치권이야말로 법보다 말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곳이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레토릭, 기득권을 뺐기 위한 레토릭이 날마다 부딪히는 곳이니만큼 정치권에서 쓰는 언어에는 이해관계나 권력관계를 포장한 레토릭이 많다. 정치 역시 레토릭으로 시작해 레토릭으로 끝나는 장르이다. 그러므로 특히 정치(인)의 레토릭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언론에 의해 걸러진 레토릭으로 뉴스를 접하는 시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준석도 이런 점을 100%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두 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영향을 준 인물이 있나.

“미국 유학 때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전당대회 연설을 보며 ‘정치란 말의 힘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정치라는 예술이라고 느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는 말 하나로 우리 사회의 연좌제를 다 풀어버린 것 아닌가.” (2021년 6월 17일자 조선일보 인터뷰)

-롤모델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스타일과 말의 힘에 대해 공감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말의 힘’면에서 족적을 남긴 분이다. 정치가 국민 희망을 주는 과정에서 말의 힘을 잘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2021년 6월 20일 한겨레 인터뷰)


이런 정치인 인터뷰나 담화를 직접 눈앞에서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99%의 사람들은 TV뉴스나 신문에서, 즉 미디어를 통해 본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보는 사람이 대다수일 텐데, 결국 미디어의 기사가 플랫폼을 통해 전송되는 것이므로) 수백 명이 한데 모여 초기 민주주의를 펼치던 고대 그리스의 공론장, 재판정은 이제 TV와 인터넷 같은 온라인 공간에서 수천, 수십만 명이 모인 가운데 수시로 펼쳐진다. 비록 현대의 인터넷 공론장에 고대 그리스의 공론장이나 재판정 같은 행정적 구속력이나 법적 구속력은 없을지라도, 어떤 목소리가 미디어에 의해 증폭되면 여론이 되고 여론은 불문법의 구속력을 갖게 된다.


뉴미디어의 시대가 만개하면서 일대일 커뮤니케이션이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여론을 사회적으로 공식화하는 것은 여전히 뉴스(미디어)이고, 뉴스(미디어)에 의해 공식화된 레토릭이 공식적으로 ‘기능’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TV매체를 가장 신뢰한다. 저녁에 모여 앉거나 식탁에서 유튜브를 켜서 TV뉴스를 보는 이유는 그곳이 바로 공론장이고, 공론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함이다.


뉴스의 세계와 수사학의 세계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닮은 점이 많다. 먼저, 뉴스와 수사학 모두 개연성의 영역을 다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수사학적 논증의 전제들이 반드시 참인 경우는 별로 없고 수사학이 판단하고 검토하는 대상은 ‘대체로 받아들여진 것’이라 하였다. 뤼스 에모시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과학적인 증명과는 반대로 (수사학적) 논증은 전문가적인 평가에 속하지 않고 여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며, 확실한 예측이나 필연적인 명백함이 아니라 대립과 토론이 가능한 열려진 문제에 대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흔히들 언론은 사실과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정쩡하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개연성을 다룬다니 무슨 말인가 할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사실과 진실은 언론이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그러나 언론이 다루는 사건과 사태, 이슈는 (과학으로 설명 가능한) 자연 현상을 포함한 정치, 사회, 문화 전반의 현상이다. 언론이 다루는 영역은 사실(팩트), 즉 증거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은 선택과 주장 또는 의견의 사이에 있다.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좋고 나쁨의 영역에 더 가깝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개별적 팩트(사실)조차도 맥락적 사실 또는 진실과는 다를 수도 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해 닉슨 대통령을 사임하게 한 칼 번스타인은 언론 보도는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버전의 진실’(The best obtainable version of the truth)이라고 말했다. 언론에서 일하다 보면 사건 초기의 보도가 뒤집히는 경우도 많고, –확실한 증거만 인정하는 보수적인 사법부에서도 심급에 따라 판결이 정반대로 뒤바뀌는 경우도 많다- 정확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날 때도 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법언이 있지만, 매일매일 시시각각 새로운 뉴스을 전해야 하는 언론의 숙명에 아랑곳없이, 지연된 팩트는 늘 언론의 존재 이유를 압박해온다.


그러나 팩트가 온전히 드러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뉴스는 늘 개연성의 영역에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그 개연성을 언론이 어떻게 소화해서 수용자들에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책임 있는 정부 당국자가 무엇인가를 발표한다고 하더라도, 이러저러한 발표를 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나머지 내용과 주장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언론이 검증해야 할 개연성의 영역으로 남는다. (문제는 오히려 항상 확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시민대중과 정부, 각 이익집단과 전문가집단 사이의 의견 충돌과 타협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어떤 주장이든 그 자체로서 팩트인 것은 없다. 하지만 언론은 이를 다뤄야 하며 이를 개연성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 무슨 주장을 했다는 사실이 보도되더라도 총체적 사실은 여전히 개연성의 영역이다. (필자가 고전 수사학을 빌어 이야기한 ‘개연성’을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안수찬 교수는 ‘잠정적, 누진적, 사회구성적 진실’이라고 표현했다)


또 현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정치 행위와 사회적 결정은 과학적 증명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합의와 타협의 영역, 즉 수사학의 영역이다. 언론은 쟁점이 되는 사안에 대한 각 입장의 논증을 검증한다. 언론학자인 박성희 교수는 저널리즘에서 사실과 의견의 세계는 각기 가는 길이 다른 것 같지만 종국에는 서로 합작해야 진실의 실루엣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하였다. 언론 역시 민주주의 ‘제도’로서 개연성의 세계는 개연성의 세계라고 정직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저널리즘이 수사학으로부터 인사이트를 얻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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