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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독 바다청년 Feb 28. 2024

하이델베르크 기행

중세도시이자 대학도시


독일 내에선 제일 유명한 관광도시 중 하나로, 대학도시이기도 하다.


중세에 지금 독일을 포함한 중부유럽의 최강자였던 신성 로마 제국, 그 황제를 선출하던 선거인을 선제후(Prince-Elector)라고 한다. 이는 게르만족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선제후국에는 북독일의 제일 강력한 가문인 작센, 후에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이 된 브란덴부르크, 지금의 체코인 보헤미아, 앞으로 서술할 팔츠 선제후국을 비롯해 마인츠ㆍ쾰른ㆍ트리어 대주교가 있었다. 이 팔츠 (Pflaz) 선제후국은 지금의 뮌헨을 주도로 삼는 바이에른과도 동일한 뿌리로, 실질적으로 남부 독일의 뿌리는 이 팔츠 선제후국이라고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팔츠의 뿌리를 따지면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먼저 대학이 설립된 시기는 1386년. 독일에서 제일 오래되었으며, 신성로마제국 전체로 따져도 비엔나와 프라하 다음으로 오래된 대학이기도 하다. 비엔나, 프라하와는 달리 비교적 소도시인 이곳에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서방 교회의 분열이 있다.

잠깐 역사를 더 살펴보자. 중세에 막강했던 교황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던 대표적인 사례가 아비뇽 유수이다. 70년간의 유럽판 ‘아관파천’이었던 프랑스 아비뇽의 교황청을 다시금 로마로 돌아오려는 움직임을 보이던 와중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추기경 사이의 권력 다툼이 일어난다. 아비뇽에서 추대된 프랑스 출신 교황, 로마에서 추대된 이탈리아 출신 교황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싸우는 바람에, 이탈리아 출신 교황이 지금의 독일 전신인 신성로마제국의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팔츠 선제후가 정치력을 발휘하여 ‘우리가 도와줄 테니 내 도시에 대학을 세우게 해줘.’ 했고 이를 받아들이게 되어 이렇게 유럽 내 비교적 소도시였던 하이델베르크에 대학을 세울 수 있었다.


이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200년 넘게 독일 내 학문 및 종교개혁 등을 선도했지만 30년 전쟁을 비롯해 여러 전란을 겪으며 쇠락을 피할 수 없었다. 반전의 계기가 된 건 19세기 초, Karl Friedrich, 바덴 공작이 하이델베르크를 비롯한 영토를 본인의 것으로 함과 동시에 대학을 다시금 중흥하면서부터인데, 그런 이유로 그의 이름이 지금의 대학 이름에도 남아 있다. 이후,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다시금 독일 낭만주의의 중심지이자 물리학, 자연과학, 사회과학을 비롯하여 기초 학문을 선도하는 종합대학이 되었다. 제일 유명한 학자로는 사회학의 아버지 막스 베버, 부끄러운 동문으로는 나치 정부의 선전장관 괴벨스도 이 학교 출신이다. 많은 다른 독일 내 대학들처럼 나치 독일 당시의 행적은 비판받아 마땅한데,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이런 색채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학문적 풍토가 쌓일 수 있었다.



다음으로 하이델베르크에서 제일 유명한 명소, 바로 시내 위에 있는 성이다. 앞서 언급한 팔츠 선제후가 머물던 곳이 하이델베르크 성으로, 13세기 후반쯤 건립되었다고 전해진다. 신성로마제국의 하나의 선제후국으로 나름대로 강한 권력이 있었던 이곳은 특히 30년전쟁 당시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17세기 보헤미아 왕, 스웨덴의 왕을 비롯해. 이후, 태양왕 루이 14세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침략을 겪으며 폐허가 되다시피 하는데 그 이후에도 완벽한 복구가 되지는 않았다. 폐허가 된 도시를 버리고, 지도자는 만하임, 그리고 이후에는 뮌헨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후, 하이델베르크와 만하임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지금의 행정구역과 동일한 바덴 공국의 영토가 된다.

이 폐허가 된 하이델베르크의 복구는 이후에도 정치적으로 논의되었는데, 19세기 후반, 일부분만 복원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폐허가 사람들에게 매력을 끌었고, 특히 이는 20세기 들어 미국인들의 입소문이 퍼지는 탓에 더 매력적인 관광명소가 될 수 있기도 했다. 이 물결은 일본을 비롯해 우리나라까지 퍼지게 됐다고 한다.


한편, 연합국의 폭격이 대부분 산업 기반 시설에 집중되었던 이유로, 이곳은 2차세계대전 당시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이곳과 같은 생활권이자 많은 산업이 몰려 있는 만하임과 Ludwigshafen이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런 이유로 구시가지 내 중세의 오랜 건축물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는데, 바로 옆 만하임의 시내가 아름답지 않다는 걸 생각해보면 하이델베르크가 축복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종전 이후 미군은 하이델베르크에도 주둔했는데, 그 당시 인구의 10% 이상이 미국인이기도 했다. 미국 주둔 배경으론, 대규모 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는 라인강 유역의 만하임과 같은 생활권이고, 대도시이자 공항이 위치한 프랑크푸르트와도 가까웠으니 그럴 만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로, 하이델베르크 외에도 근방에 미군 주둔지가 많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독일 내 해외군 주둔지. Wikipedia

하이델베르크 구시가지에서 네카강을 건너 언덕을 올라가면, 철학자의 길이라고 있는데,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30분여를 등산하면 나치가 본인들의 공연 및 선전장소로 사용하던 Thingstätte에 갈 수 있다. 이곳은 흡사 그리스-로마 시대의 원형극장 같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미군들이 종전 이후 이곳을 공연장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시민들이 마녀가 활동한다는 발푸르기스의 밤의 축제 장소로 쓰인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바이에른 남부에 있는 히틀러의 별장도 그렇고, 나치는 항상 꼭대기에 엄청난 건축물을 지었다. 부와 권력을 과시하고자 했던 그들의 모습인데, 높은 곳에 권력이 있다는 건축의 격언이 이번에도 들어맞는다.


필자가 최초로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한 것이 7년 전이다. 그 당시 일정에 쫓기며 구시가지만 슬쩍 보고는 다 봤다고 생각했거늘, 구석구석 가볼 만한 곳이 많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그곳의 역사와 지리 등을 계속 살피다 보니, 유럽 전체에 대한 흐름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음은 좋은 일이다. 예를 들면, 베를린에서는 독일의 근현대사에 대해 더 깊게 고찰할 수 있고, 라인과 도나우 유역의 몇몇 도시에선 유럽의 뿌리인 로마의 흔적을, 하이델베르크와 같은 중세 도시에선 중세의 흐름을 더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관심, 그 깊이가 점점 깊어지다 못해 스스로 느끼기엔 과하다고도 느껴지기도 한다. 역사 전공도 아니고, 이것으로 유튜브를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스스로 부족한 점도 많이 느낀다. 독일의 역사와 그 뿌리를 이제는 많이 공부했고, 어느 정도 큰 흐름을 뀄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다시 정리하며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되기도 했다. 독일도 이러한데, 아직 본격적으로 가보지 못한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등 참 가볼 곳도, 모르는 것도 많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어느 순간 이곳에서의 삶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이런 과정이 차근차근 데이터로 쌓여 좋은 결실이 맺을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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