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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영 Oct 08. 2023

정치가 금리를 좌우하게 하지 마라

2022년 11월 24일, 한국은행이 사상 처음으로 여섯 차례 연속 금리 인상을 단행했을 때였다. 보통 기준금리가 오르는 날 은행들은 새로운 예·적금 금리를 발표해 다음날부터 적용하곤 했는데, 이날은 어찌 된 일인지 잠잠했다.


금융당국이 예금 금리 인상을 자제하라고 은행들을 압박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바로 다음날 "금융권의 과도한 자금 확보 경쟁은 금융시장 안정에 교란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만큼 자제할 필요가 있다"라고 메시지를 던졌다. 금리를 올리지 말라는 뜻이다.


'머니무브'를 막자는 취지였다. 


당시 국내 5대 은행 예금 금리는 연 5% 안팎이었다. 계속해서 금리가 오르면 시중 자금은 2금융권에서 빠져나와 1금융권으로 쏠릴 터였다. 가장 안전한 은행에 맡겨도 5%대 쏠쏠한 이자를 받을 수 있는데, 굳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안정성이 떨어지는 곳에 돈을 맡길 이유가 없는 거다. 2금융권에 유동성 위기가 올 수도 있다.

게다가 예적금 금리가 오르면 대출 금리도 올라서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대출금리는 코픽스(COFIX)라고 하는 자금조달지수에 은행 원가, 마진 등을 더해 정해진다. 그리고 코픽스는 예적금 금리에 영향을 받는다. 즉 예적금 금리가 오르면 코픽스가 상승하고, 코픽스를 기준으로 정해지는 대출금리도 따라 높아진다. 한국은행 계산에 따르면 금리가 0.25% 포인트 오르면 전체 가계대출 이자는 약 3조3000억원 늘고 1인당 연이자 부담은 16만4000원씩 커진다고 한다. 그리고 돈 벌어 이자도 못 갚는 한계기업(좀비기업)이 급증할 위험이 있었다.


종합해 보면 고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올리는 극약 처방을 하는 상황에서, 의도치 않은 금융 시스템 붕괴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이런 부실 금융기관이나 한계차주들을 망하도록 둬야 자본주의가 더 건강해진다는 이론도 있다.)

한국은행 기준금리 / 출처 한국은행 통화신용정책 보고서 중

그런데 해가 바뀌고 금융권 압박 수위가 한층 세졌다.


기준금리가 연 3.50%로 한 차례 더 올랐다. 이를 전후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상생금융'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주창했다. 고물가를 해결하기 위한 긴축 통화정책으로 서민과 기업은 고통받는데, 은행은 이를 기화로 앉은자리에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으니 그 이익을 나눠야 한다는 취지다.


이 원장은 서울이든 지방이든 종횡무진 출장을 다니면서 "대출금리 인하가 은행권 전반으로 확산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손길 발길이 닿은 금융권은 속속 대출금리를 낮추고 취약차주를 위한 금융상품을 내놨다.


금융위원회는 고금리로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는 걸 막겠다면서, 각종 각종 대출 규제도 느슨하게 했다. 중도금 대출제한 폐지, 특례보금자리론, 무주택자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일원화, 전세반환 DSR 완화 등이다.


정부의 정책이 통화정책 효과를 깎아먹을 거란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리는 건 차주들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 경제에 치명적인 인플레이션(고물가)을 잡기 위해서다. 


기준금리로 물가를 통제하는 메커니즘은 다음과 같다. 기준금리가 오르면 은행권의 예적금·대출금리가 오른다. 그러면 시중의 돈이 줄어들면서 물가상승률이 떨어지게 된다. 그런데 금융당국이 중간 단계인 예적금·대출금리를 억누른 것이다. 

통화정책 경로 / 한국은행 홈페이지

당시 금융당국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


이 원장은 2023년 2월 기자간담회에서 통화정책의 파급경로는 여러 가지이므로 은행 금리를 눌러도 긴축 정책의 대세 효과엔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그리고 "대부분 국민이 개별적으로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금리 인상 효과가 이뤄졌고 작년 하반기부터는 소비위축으로 경기침체가 가중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금리 인상 효과가 없어서 걱정이라고 할 건 아니지 않으냐"라고 덧붙였다.


금감원장이 금리인상의 효과를 평가한다? 한국은행과 금융통화위원회의 존재를 거의 무시하는 발언 아닌가 싶다. 당시에 왜 이렇게 반문하지 못했을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트위터(X)

정치인은 금리를 누르고 싶어 한다


금융당국은 왜 이렇게 금리를 압박하지 못해 안달이었을까? 금리는 정치적 인기와 연결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의 조금 극단적인 사례를 보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2020년 5월 자신의 트위터에 "미국도 다른 나라들처럼 마이너스 금리라는 선물(gift)을 받아야 한다"라고 썼다. 그러면서 "Big numbers!"라고 덧붙였다. 금리가 낮으면 낮을수록 좋다는 뜻이다. 자신의 인기를 위해, 기준금리 결정 권한을 가진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압박한 것이다. 당시는 코로나19 위기가 터진 이후였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더 노골적이었다. 그는 2018년 5월 대선을 앞두고 "금리는 만악(萬惡)의 어머니이자 아버지"라며 "금리의 저주에 맞서 싸워 승리하겠다"라고 으름장을 놨다. 트위터 메시지를 날린 트럼프는 약과였다. 튀르키예의 철권 통치자는 금리를 내리라는 자신의 뜻을 거스른 중앙은행 총재를 세 명이나 해임했다.

Micrsoft Bing AI가 그려준 '금리를 낮추라고 강요하는 정치인'

부작용은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채 증가로.


2분기 가계대출 잔액은 1862조8000억원으로 전분기 대비 9조5000억원 늘었다. 3분기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다. 


한국은행도 이제 정부를 상대로 팩폭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2023년 7월 기준금리 동결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가계대출 증가가 우려스러운 게 사실"이라며 경고했다.


그리고 한은은 2023년 9월에 발간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부채 증가에 대한 책임이 정부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가계대출은 금년 4월부터 주택 관련대출을 중심으로 증가 전환한 이후 증가폭이 확대되고 있다. 가계대출 증가는 주로 정부의 규제완화 등에 따른 주택가격 상승 기대 강화, 정책 지원, 대출금리 하락 등에 기인한다. (55쪽)
가계대출 증감 추이 / 한국은행 2023년 2분기 가계신용(잠정) 보도자료

멋쩍어진 금융당국. 하지만 본인들 잘못은 자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내놓은 은행 탓"이라며 화살을 돌리고 뒤늦게 수습에 나서는 모양새를 취했다.


어쨌든 잘못을 알았다면 제때 제대로 잡길 바란다. 정부는 가계대출 증가세가 9월부턴 진정될 거라고 공언했는데 정말 그럴지 지켜봐야겠다.


그나저나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내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상생금융을 본인의 업적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설마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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