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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센트 Oct 3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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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의 근무 시작 첫 일주일은 으레 그렇듯 정신없이 지나갔다. 영내과는 수액과 영양제를 주력으로 하는 병원이었는데 근무 인원은 두 명으로, 접수실과 수액실에서 교대로 근무했다. 각 사업체마다 고유한 문화와 일처리 방식이 있기 때문에 업무를 익히고 숙달하는 데 시일이 조금 걸렸지만, 전 직장에서 하던 일에 비하면 소일거리 수준이었다. 


“아휴, 쌤 일 너무 잘하신다. 가르칠 게 없네. 아니, 오히려 내가 배워야겠어요.”

“설마요. 칭찬 감사합니다.”


해원이 맡은 일마다 식은 죽 먹듯 척척 해내자 선임인 정희는 물개처럼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속을 훤히 드러내는 투명한 유리상자 같은 모습은 대형 조직 문화에 익숙한 해원에게는 조금 낯선 것이었다. 애가 셋이라는 그녀는 솔직하고 화통한 성격에 행동이 시원시원해 같이 일하기 좋았다. 덕분에 새 직장에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물론 악명 높은 빅5 신입 시절을 견뎌낸 경력이 있어 크게 걱정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신입은 신입.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법. 방심은 금물이었다. 해원은 모든 것을 새로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새로운 일터를 관찰했다. 


영내과는 시골 병원답게 환자 대부분이 노인들이었고,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만성질환으로 진료는 5분 보고 이야기 보따리는 20분씩 풀어놓는 단골들이 주를 이뤘다. 


“예... 어머니, 버르장머리 없는 사위분을 족발뼈로 응징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흥미진진하지만 다음 기회에 마저 들어야겠어요.”

“이제 시작인디?”

“다음 환자 봐야 돼요.”

“이잉, 나는 더 있고 싶은데.”


김 원장은 환자의 건강과 무관한 이야기는 ‘관심 없음’이라고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써놓고 응대했지만 노인들은 개의치 않고 그에게 온갖 신변잡기를 늘어놓았다. 손주 예쁜 거랑 당 수치 오른 게 무슨 상관이냐며 오만상을 하면서도 꼬박꼬박 대꾸해 주는 원장은 수다쟁이들의 신명을 돋우는 데가 있었다. 의사선생님이랑은 말이 잘 통한다며 후련한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서는 그들은 뒷담화하러 고해실을 찾는 마을 주민들을 보는 것 같았다.


“애기가 병원에는 왜 왔어, 할미들 속상하게.”

“아이구~ 쪼끄만 거 봐. 강아지네, 강아지.”


이따금은 소아환자가 찾아오기도 했다. 엄마 손 꼭 붙잡고 뒤뚱뒤뚱 걸어 들어오는 작은 손님은 노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고사리 같은 손은 금방 호박엿, 유가사탕, 홍삼캔디 따위로 가득 찼고, 어린애라면 껌뻑 죽는 노인장들은 말도 아직 다 못 배운 아이와 스무고개를 하곤 했다.


“우리 아가는 뭐 먹구 이렇게 귀여워요?”

“오늘… 아침에 오무라이쯔… 머것더요.”

“오구, 말도 잘허네. 맛있게 먹었어요?”

“맛은… 모르겟더요….”

“어머머, 얘 딴소리하는 거 봐. 언제는 엄마가 만든 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며!”

“하하하하.”


어른들은 아이의 엉뚱한 말 한마디에 웃음꽃을 한바탕 피웠다. 그러고 나니 아픈 게 싹 가시는 것 같다는 그들의 눈길에는 기억과 감정의 편린이 뒤섞여 있었다. 그건 사랑스러움, 애틋함, 그리움과 많이 닮아 있었다.


종종 사색이 되어 내원하는 청소년, 청년들의 경우엔 배탈 환자가 많았다. 


“배가… 배가 아파요, 선생님.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어제 오늘 뭐 드셨어요?”

“어… 그냥… 별 거 안 먹었는데….”

“혹시 마라탕 드셨어요?”

“네? 아니요. 그건 저번주에….”

“그럼 엽기떡볶이?”

“헉. 어떻게 아셨어요?”


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는 강아지들이 겨울철만 되면 고구마 먹고 비만 돼서 뚱기적대면서 수의사를 찾아오듯 젊은이들이 걸핏하면 맵고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으로 장을 학대하고 온다며 탄식했다. 그들은 약과 함께 하루이틀 정도 금식하라는 처방을 받는데, 대체로 반나절을 참지 못하고 먹어서 원장의 가차없는 구박을 듣곤 했다.


“자… 환자분, 주사 끝났어요. 솜 문지르지 말고 5분 정도 꾹 눌러 주세요.”

“네에….”

“문지르시면 안 돼요. 멍 들어요.”

“아이구… 나도 모르게 그만.”


수액 투여가 끝난 환자의 팔에서 주사바늘을 빼낸 해원은 핏방울이 맺히는 살갗에 알콜솜을 꼼꼼히 붙이며 환자에게 신신당부했다. 노인들은 말귀가 어둡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워해서 주의사항이 있으면 여러번 반복해서 주지시켜야 했다.


“자, 이렇게… 얼음! 이따 제가 땡하러 올 때까지 움직이시면 안 돼요.”

“허허허. 알았어요.”


너털웃음을 짓는 노인을 뒤로 하고 해원은 다 쓴 수액팩과 주사바늘 등 폐기물을 챙겨 수액실을 나섰다. 점심시간은 교대근무를 해서, 한 사람이 밥을 먹고 쉬는 동안 다른 사람은 접수실과 수액실을 오가며 종종걸음을 해야 했다. 그래도 환자들이 오전에 한바탕 몰렸다가 점심 즈음이면 슬슬 한산해져서 충분히 할 만했다.


하루 일과가 새벽 네 시에 시작되는 농촌 특성상 병원이 문을 여는 오전 아홉 시는 주민들에게는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었다. 영업 시작 전 닫혀 있는 병원 문 앞에서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아침잠 없는 노인네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오전에는 정신없지만, 볕이 따뜻해지는 오후부터는 한가해져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포동포동한 참새가 창틀로 포르르 날아와 몸단장하는 걸 구경하기도 하고, 화분에 물을 주기도 하고, 환자가 출출할 때 먹으라고 주머니에 넣어 준 바람떡을 우물우물 씹으며 커피를 빨대로 쪽 빨아들이기도 하고, 창 밖의 먼 산을 보며 멍때리기도 했다. 


그건 익숙치 않은 평화였다. 늘 최전선에서 싸우는 기분이었는데. 생사의 경계에 선 사람들을 어떻게든 붙잡아 당기는 것이 지금까지 해원이 해 온 일이었다. 내일이 당연한 환자들이 에어컨 아래 따끈한 핫팩을 배에 얹고 잠든 가운데 수액 떨어지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평화로운 고요는 휴전병(休戰兵)을 침잠시켰다. 해원은 바닥을 물들이는 한 평의 햇살을 마냥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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