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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센트 Oct 30. 2022

(9)

2. 쫄면과 팥칼국수


“요잇!”


화투 패가 짝 소리를 내며 장판 위에 차지게 달라붙었다. 신중한 표정으로 손에 쥔 패를 들여다보던 노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패를 쫓았고, 곧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필승패를 내놓은 노인이 히죽 웃으며 판돈을 한 품 가득 긁어모았다.


“하이씨…. 오늘 드럽네, 드러워.”


현순례 여사는 쥐고 있던 패를 방바닥에 패대기치며 꿍얼거렸다. 이번 판만큼은 승리를 확신했건만 또 참패다. 한때 경로당 타짜로 이름을 날렸던 그녀로서는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간 저 오가놈만 끼면 패가 힘을 못 쓰고 자꾸 싼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돈을 착착 세는 할배 오진태는 단풍 실버센터의 뉴비였다. 자식들 용돈 받아 사는 노친네들 코 묻은 돈 싹쓸이해가면서 개평 떼어 줄 줄도 모르는 게 아주 근본이 없는 놈이다. 현 여사는 콩기름을 발라 놓은 듯 반질반질한 면상을 노려보다가 끙차, 하고 몸을 일으켰다. 오도독. 무릎에서 곡소리가 난다.


“벌써 가게?”

“뭘 벌써여. 갈 시간 됐는디.”


사방에 내팽개쳐진 화투짝을 줍던 옆자리 노인이 묻자 현 여사가 불퉁거렸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 뜨고, 시계는 정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점심 먹을 시간인데 아무도 궁둥이 뗄 생각을 안 한다. 징글징글한 놈들.


“어디 가는디?”

“병원.”

“떼잉, 한 판만 더 하구 가.”

“염병헐, 열 받아서 온몸이 아퍼. 가서 혈압이나 재 봐야지.”


현 여사는 들으라는 듯 외쳤지만 수악한 오가놈은 딴 세상이었다. 그는 뺨에 사과 같은 홍조를 띤 채 지갑에 지폐를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넣고 있었다. 딸내미가 제철음식 챙겨 드시라고 찔러 준 생떼같은 용돈이… 현 여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외면했다.


“영내과 가게?”

“그럼 거기 말고 어딜 가.”

“많지. 정읍 바닥에 널린 게 병원인디.”

“그럼 뭐해. 가고 싶은 데가 없는디.”

“하여간 까탈시러워.”

“시끄러.”


그녀는 시시덕대며 놀리는 친구에게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문밖을 나섰다. 곧 버스가 올 시간이었다. 배차 간격이 길어 놓쳤다간 다음 차가 올 때까지 한 시간을 꼬박 기다려야 했다. 현 여사는 서둘러 발길을 재촉했다.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정류장에 다다르자 마침 버스가 오고 있었다. 시간 딱 맞춰 왔구만. 현 여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차에 올라탔다. 허리 굽은 노파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 느릿느릿 승차하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트로트가 흘러나왔고, 기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느긋하게 다리를 떨었다.


“팔십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쓸 만해서 못 간다고 전해라~.”


팔십 . 여기저기 고장은 났지만 아직은  만하다. 삐걱대는 몸을 좌석에 안착시키며  여사는 그리 생각했다. 머리는 지끈지끈하고, 무릎도 아프고, 삭신이 쑤시지만 이렇게 직접 병원도 다니지 않는가. 누군가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는 것은 42년생 현순례 여사의 자부심이자 자랑거리였다. 주머니에서 쌈지를 꺼내 오늘치 진료비와 약값을 확인하던 그녀는 지갑의 부피가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을 느끼고 주먹을 옹송그려 쥐었다. 아무래도 가는 동안 명상이라도 해야   싶었다.  여사는 창가에 머리를 대고 애써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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