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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센트 Oct 30. 2022

(8)

지원한 곳들 전부 다 붙어버리고 오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길 가다 우연히 들른 병원에 지원했다가 한방에 철썩 붙어 버리는 바람에 다른 곳은 가보지도 못했다는 해원의 무용담을 들으면서 복덕방 사장은 영혼은 없지만 성의 있게 리액션하고 부동산 매물 리스트를 내밀었다. 


“자, 최대한 괜찮은 놈들로다가 구해왔으니까 골라 봐요. 갑시다.” 


서비스로 손님들 구두 닦아 주던 시절부터 복덕방을 운영해 왔다는 그는 과연 준수한 매물들을 물어왔다. 그와 함께 부지런히 발품을 판 해원은 두 번째로 본 집을 낙점했다. 거실로 노을빛이 듬뿍 들어오는 투룸은 채광도 좋았고, 주방도 그만하면 쓸 만했다. 


“요즘 날씨가 습해서 곰팡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아침저녁으로 환기 시켜줘야 해요. 가스는 쓰고 나면 꼭 잠그고… 또 문단속 잘하구. 모르는 사람이 문 두들기면 집에 없는 척하고.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요.”


사장은 일장연설을 꼬장꼬장 늘어놓고는 임대차 계약서와 비상열쇠, 입주민 준수사항 외 자잘한 서류들을 두고 떠났다. 해원은 캐리어를 눕히고 지퍼를 열었다. 가방 내부에 쌓여 있던 압축 팩을 착착 꺼내 하나씩 개봉했다. 말린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었던 팩이 호빵처럼 부풀었다. 안에서 뭉게뭉게 밀려 나오는 이불에서는 서울집 냄새가 났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해원은 이불에 코를 파묻은 자세 그대로 숨을 죽였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으니 문 너머로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복도에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고개를 빠꼼 내밀었다. 문앞에는 입구를 야무지게 묶은 허연 봉투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해원은 봉투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어 집 안으로 들고 들어왔다.


이삿날에는 뭐니뭐니 해도 짜장면이지. 해원은 배달이 완료되었다는 핸드폰 메시지를 지우고 본격적인 식사 준비에 돌입했다. 


근처 마트 포장대에서 주워 온 박스를 조립하고 그 위에 깔자 그럴 듯한 테이블이 완성되었다. 해원은 봉투를 끄르고 유니짜장과 단무지, 양파와 춘장, 군만두, 그리고 서비스로 온 짬뽕 국물까지 꺼내 상을 차렸다. 그녀는 핸드폰을 가로로 들고 테이블 위로 팔을 쭉 뻗었다. 각도를 섬세하게 조절해 음식들이 빠짐없이 화면 가득 들어오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근사한 ‘항공 샷’을 건진 그녀는 만족스럽게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그릇을 덮은 랩을 뜯어내자 따끈한 김과 함께 고소한 냄새가 피어 올랐다. 군침을 꼴깍 삼킨 해원은 나무젓가락을 딱 소리 나게 나누고 두 손으로 빠르게 비볐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짜장 소스 위로 짬뽕 국물을 살짝 뿌리고 면을 비비기 시작했다. 손목을 움직일 때마다 찰기 어린 소리가 났다.


소스가 고르게 묻은 짜장면이 형광등 아래 갈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해원은 젓가락을 멈추고 면에 양념이 잘 배도록 기다렸다. 속으로 20까지 센 후 손목을 돌려 젓가락에 면발을 칭칭 감았다. 꿀봉처럼 돌돌 말린 면덩어리를 호호 불다가 입에 크게 욱여넣었다. 짜장면 첫 입은 무조건 제일 크게, 최대한 많이.


후루룩.


짭조름하고 달큰한 맛이 입 안에 퍼져 나갔다. 쫄깃하고 탱글한 식감과 고소한 풍미에 감탄이 나왔다. 볼이 미어지도록 입 안 가득 짜장면을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키자 면이 물 흐르듯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리뷰 작성을 약속하고 받은 군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콰사삭 소리와 함께 튀긴 만두피가 부서지며 육즙이 흘러나왔다. 겉면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게 제대로 튀겼다. 기름기와 육즙이 뒤섞여 혀 위에서 감미로운 조화를 만들어 냈다. 


여기엔 배갈이 딱인데. 입맛을 다시던 해원은 편의점에서 고량주를 사 올까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다녀오는 사이에 면이 불어버릴까 봐 단념했다. 박스 주워올 때 맥주도 살 걸 그랬다. 아쉬워하며 짬뽕 국물로 목을 축였다. 진하고 칼칼한 국물이 시원하게 내려갔다. 해원은 새콤달콤한 단무지와 아삭아삭한 양파로 입가심해가며 짜장면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아… 배부르다.”


식사를 마친 해원은 포만감에 숨을 길게 내쉬며 손을 뒤로 뻗어 바닥을 짚었다. 어수선한 집 안에서 박스를 식탁 삼아 짜장면을 먹고 나니 이제야 이사 온 실감이 났다.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시작한 여행이었다. 어디로 갈지도, 무엇을 할지도 모른 채 캐리어 하나 끌고 무작정 기차에 올라탔다. 있던 곳만 아니면 어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해원은 천천히 바닥에 드러누웠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이웃집 TV 소리와 오토바이의 배기음, 행인들의 발자국 소리, 조곤조곤한 대화 소리가 마음을 다독였다. 서늘한 밤바람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해원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창밖으로 보이는, 휘영청 뜬 보름달이 단무지 같다고 생각하며 팔로 눈가를 덮었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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