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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솔은정 May 05. 2024

시작했으니 마칠 힘도 있지.

2019.09


 태풍이 오면 거센 바람에 다 날아가니 그 모든 게 나쁠 거 같지만 태풍이 지나고 나면 바다가 위아래 뒤집어지면서 오히려 바다의 생태계가 보전되고 뜨거웠던 해수면의 온도도 내려가게 되니 거센 폭풍이 오히려 고마운 일이 된다.


삶의 바다도 마찬가지다. 거세게 다가온 폭풍이 삶의 질서를 다 뒤집지만 새롭게 나갈 수 있는 길과 방법의 시작이니 내게 온 거센 파도와 폭풍이 나쁜 일만은 아니다.

내게 새로운 삶의 태도와 삶의 습관을 안기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어제는 그이의 분당서울대병원 진료 날

다학제라고 해서 뇌종양팀이 꾸려지는 날인데 그이의 진료를 위해 mri를 찍어달라 성모병원에 부탁하고 좀 분주했었다. 기다리는 그 시간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나는 해석도 안 되는 남편의 뇌사진을 놓고 여러 선생님이 들여다보고만 계시고 침묵의 시간이 흐를 때.

나는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이가 내 손을 꼭 잡는다.

신경외과, 종양내과, 방사선종양학과, 영상의학과 선생님 네 분이서 그이의 영상자료를 놓고 설명해 준 뒤,

"항암치료 한 번 해볼 만합니다. 테모달로 먹으면서 시작해 보죠."


 "어? 항암치료가 되나요? 성모병원에서 설명 듣기로는 지금 상태에서는 하고 싶어도 못한다 하더라고요. 3기 재발이거나 4기에서만  가능하다던데요.”


“아닙니다. 이 병변이면 충분히 할 수 있고 하는 게 좋습니다.”


항암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엄청 희망적이었다.

 지난번 성모병원 주치의 샘과 상담하고 난 뒤 그래도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분당서울대로 가보겠다고 말을 건넸을 때 주치의 샘이 흔쾌히 의뢰서 써주시고 인사해 주셔서 감사했다.

만약 그게 내 일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남편 일이 되고 보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조언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예약 잡은 것에 감사다.

그이의 치료 방법이 있다길래 정말 감사하고 좋다. 그이도 희망적인 말에 밝아진 얼굴로 웃는다.

 종양내과 선생님은 집이 전주라고 하니 오고 가는 시간까지 배려해 주시고 다음 진료도 신경과와 종양내과 시간을 맞춰주시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 모습을 보더니 혹시 항암을 받고 있냐고 물으시며 내 상태까지 점검해 주셔서 고마웠다.

 병원 다니면서 두 개 이상의 과가 맞물리면 스케줄 맞추기가 정말 힘든데, 시간을 이리 딱 맞춰주면 정말 고맙다. 항암요법 교육을 받고, 영양섭취 교육도 다음번에 받기로 했다.

어쨌든 치료 방법이 있다니 그걸로 감사고 기쁘다.  


   모자를 쓰고 그이 보호자로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외과 항암실에 따라가서 설명을 듣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기계적으로 설명하시다가 너무나 잘 알아듣는 우리를 보시더니 갑자기 놀란 얼굴로

" 아내 분도 항암 중이세요?"

"그러게요. 같이 해서 설명이 쉽게 들리네요."

"뭐라 할 말이 없네요."

"그런데, 항암 받으시는 분이 얼굴이 너무 좋으신데요?"

"다행이네요. 항암이 미모는 죽이지 않아서요."

"하하하하하. 두 분이 밝아서 보기 좋네요."

"고맙습니다. 시작했으니 끝도 잘 마칠 수 있겠지요?"

"그럼요!"


나는 3차 항암이 끝났고

그이는 이제 항암 시작이다.

시작했다는 건 마칠 힘도 우리에게 있다는 거지.

우리 잘 마쳐보자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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