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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좋았던 이유

엄마도 성장 중이야.

by 해솔은정

재경, 윤서야!

엄마가 없는 동안 잘 지낸 거 같아 기분이 좋다.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서 지낸 시간 말고는 이렇게 오래 집을 비워 본 적은 처음이지?

가기 전에 별 준비도 없이 여행을 갔는데, 가끔 전화하면 둘이서 밥도 잘해 먹고, 건강하게 잘 지내더구나.

세탁기가 돌아가는 것이 엄마 핸드폰으로도 연락이 오니, 반가움도 들고 일상생활을 누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을 하고 있나 보다 생각했어. 사실은 여행 중에 집안일 걱정은 별로 한 적이 없어. 둘이서 아마 잘 지낼 거라 믿음이 크니까 생각도 안 할 때가 많았어.

집에 돌아오던 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니 익숙한 우리 집 내음에 웃음도 나오고 깔끔하게 치워놓은 재경 솜씨에 엄마는 감동했지. 엄마 돌아오면 엄마 기뻐하라고 열심히 치웠겠거니 생각하니 감동이지.- 윤서 방만 빼고 다 치웠다는 재경 말에 엄마는 웃었어.

당연하지! 얄미운 동생의 방은 치우지 않아도 돼. 지가 알아서 치울 테니까.


15일 만에 집에 온 엄마를 꼭 껴안고

“엄마, 너무나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는 윤서는 아마 집안 치우기보다 엄마 기다렸을 그 마음을 그 고백으로 다 해버렸으니 재경언니를 약 올리기는 게 충분했을 거야.

열심히 청소한 재경보다 그 고백 한 마디로 엄마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은 동생이 얼마나 얄밉겠어?

엄마는 다 알지~. 재경과 윤서의 마음을. 엄마도 여행 막바지에 다다르니 너희 둘이 많이 보고 싶고, 비행기에서 내릴 무렵에는 정말 정말 보고 싶었지.


엄마는 이번 여행기간 동안 좋았던 게 많았어.

첫 번째, 너희 둘이서 잘 지낼 거라는 믿음이 내게 있음을 알게 되니 참 든든하다는 것.

엄마들의 쓸데없는 고민들 중 하나.

“밥은?” 이란 질문으로, 뭐 먹지와 어떻게 먹지를 걱정하지.

특히나 떨어져 있는 자녀들에게 가지는 엄마들의 걱정은 무엇을 먹고 어떻게 먹고 있나 가 관심사니까.

전화하면 뭐 먹었는지,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게 되잖아.

그런데 엄마가 현재를 누리고 있는 여행을 하게 되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게 된다는 걸 알게 된 거지.

보통 “밥은?” 이란 말은 어떻게 지내는지의 안부도 포함되어 있지만, 너희 둘에게 난 아직 필요한 존재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되었던 시간이야. 내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하고 도움이 될 때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존재 그 자체로 너희에게 커다란 사랑이란 걸 알게 되니 행복하지.

그래서 아마 뭐 먹고 있냐는 말은 예전보다 덜 물어본 거 같아.

두 번째는 엄마 안에 존재하고 있던 원래의 용기를 알아차리게 된 거야.

없던 용기가 생겨난 게 아니라, 원래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게 더 좋아.

용기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행동해 보는 것이 진짜 모습이거든.

엄마가 여행을 간다고 하거나, 15일간 긴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질문은 비슷해.

물어보지 않아도 비슷할 거 같긴 해.

“ 돈이 많은가 봐요. 어떻게 해요? 시간은 어떻게 내요?”

우리 함께 50일간 유럽을 떠났을 때도, 돌아와서 여행기를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질문은 그 두 가지였어.

맞아! 돈과 시간은 엄청 중요하고 여행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돈과 시간을 쓸 줄 아는 용기라는 걸 엄만 너희에게 말해주고 싶어.

늘 알고는 있지만, 가끔 두려움에 잠식되어 버릴 때가 있어.

돈에 대한 걱정, 시간(이것도 결국 돈과 연결되어 있더라)에 대한 걱정은 끝이 없지.

너희 둘 다 알다시피, 엄마가 그다지 계획적이지 않은 사람이잖아. 그래서 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지. 준비하지 못한 미래에 대해 무섭고 두려워서 현재에 더 묶여 있던 거지.

이번 여행을 초대한 선생님은 엄마가 평소에 많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인데, 발칸반도에 함께 가자고 해주셨을 때 기꺼이 응했지만 바로 뒤따라오는 걱정은 여행경비와 시간문제였거든. 그래도 1년 전에 말씀해 주셨으니까, 조금씩 준비해 보는 것도 있었고, 수업도 양해를 구하고 나니 잘 해결되었지. 함께 가자고 해주시니 용기를 다 내서 가보게 된 거지.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고 싶어.

여행에 대한 걱정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가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라고는 말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엄마에게 돈은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그 걱정이 제일 큰 거지.

가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그때부터 여행이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어,

어떻게든 시간을 내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서 가게 되니까.

할 수 없다는 핑계는 백만 가지 만들 수 있지만,

할 이유는 딱 한 가지.


"내가 원하는가? 진심으로 원하는가?"

여행이 좋았던 이유

세 번째.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득 받은 것.

처음으로 나보다 모두 언니들인 인생선배님들과 함께 떠나서, 엄마가 여행 내내 막내의 즐거움을 누렸지. 여행기간 내내 엄마는 어리고 젊은 사람이었지. 게다가 엄마가 뭘 찾거나 알려드리면 그렇게 칭찬해 주실 수가 없는 거야. 엄마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거 마냥.

엄마는 어린애가 된 거 같았어. 나의 천진난만함을 언니샘들이 다 건드려주셔서 엄마는 엄청 많이 웃었어.

그리고, 나이 듦에 대한 기대감을 가득 주셨어. 엄마에게 그러시더라.

“ 샘! 예순이 되면 인생은 더 너그럽고 평온해요. 걱정 말고 쉰아홉을 건너오세요.”

그 말에 눈물이 났어,

자녀에 대한 책임감을 대부분 마치고,

이제 나의 삶에 대해 더 알차게 살 수 있다고,

살아갈 시간들에 대해 더 기대해도 좋다고 말씀해 주셨거든.


재경은 맏딸이라 어린 동생에 대한 책임감도 있고, 혼자 남을 엄마에 대한 애틋함과 책임감이 크지.

그러다 보니 여행 가서 좋은 거 보고, 맛난 거 보면 엄마와 윤서 생각부터 난다고 했을 때,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어, 사랑하니까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미안함이 더 느껴진다고 했을 때 엄마는 재경이가 고맙고 안쓰러웠지. 그러지 않아도 돼.

현재를 잘 누리는 것이 재경을 행복하게 하는 거니까

재경 마음을 미안함보다는 사랑과 주고 싶은 마음으로 스스로 해석해 줘.

엄마가 여행에서 사랑받는다고 느꼈던 그 마음을 재경에게도, 윤서에게도 전해주고 싶었어.

사랑은 흘러 흘러 전해지니까. 너희 둘에게도 엄마의 사랑을 전해.


여행이 좋았던 이유

네 번째, 상대의 감정은 상대의 것이고, 내 감정이 아님을 바라보게 된 것.

엄마는 감정의 전이가 너무나 빠르고 강력한 편이라,

상담하는 거 말고는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들이 좀 힘들 때가 있어.

상대의 감정이 내게로 건너올 때 마치 내 감정으로 착각이 되기도 해서 말이야.

그런데 여행 중에 상대의 감정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그 감정이 내 책임이 아니고,

상대의 감정임을 알아차리게 될 때 해방감이 있었지.

여행은 24시간 누군가와 함께 지내게 되잖아.

방을 같이 썼던 룸메이트 선생님이 정말 좋았어. 오래 이야기하고, 나를 알아차리게 해 주신

선생님 덕분에 여행이 더 즐거웠지.

너희들과 15일간 떨어져 지내는 동안. 앞으로 너희가 엄마 곁을 떠나 독립해도 엄마 혼자서

잘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는 두 딸들 덕분에

엄마의 여행은 참 즐거웠어.



엄마 다녀오라고 해줘서 고마워.

엄마는 지금도 성장 중이야. 서른 살의 엄마도 처음이고, 사춘기 겪는 둘째의 엄마도 처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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