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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제이 Apr 01. 2020

산 초보라도 등산화는 신어야지

나 혼자 산 탄다(3)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솔직히 말하자면 예전부터 취미생활을 끈덕지게 해 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의욕에 불타 시작했던 취미생활이었지만 점차 지루해지고 귀찮아져서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길어봤자 한두 달이나 갔을까. 예전에는 살을 뺄 겸 해서 스쿼시를 시작했었던 적이 있었다. 공치는 운동은 자신 있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호기롭게 스쿼시 한다는 자랑을 해놨던 터라 처음에는 의욕에 불타 시작했더랬다. 강사님도 공을 잘 친다면서 매번 칭찬해준 덕분에 더욱 신이 나서 항상 칼퇴를 하고 스쿼시장으로 달려갔었다. 하지만 그 열정이 식는 건 3개월이면 충분했으니...... 다른 운동도 해보고 싶다는 번드르르한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스쿼시 시작 3개월 만에 처음 시작할 때의 열정이 사그라들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수두룩한 중도하차 경력의 소유자였기에 과연 이번의 등산이라는 취미는 얼마나 갈지 나조차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슬램덩크 강백호의 명대사를 외치고 싶다.

 '(등산)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처음 등산을 시작했던 도봉산에 향하게 된 것은 지난번에 이루지 못했던 정상 탈환의 목적도 있었지만 더 큰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지난번 수락산 등산 때 어르신들로부터 얻었던 꿀팁을 참고하여 진정한 등산인으로 거듭나고자 번듯한 등산화를 구매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인터넷에서 간편하게 원클릭으로 구매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생애 첫 등산화이니 만큼 반려 신발을 들인다는 생각으로 요모조모 살펴보며 직접 신어보고 살 참이었다. 지난번 등산 때 두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들었던 도봉산 입구의 휘황찬란한 등산용품 가게들이 첫 등산화 구매지로는 적격이라는 생각에 또다시 도봉산행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등산화는 처음이라서요'

등산화, 내 돈 주고 등산화를 사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등산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운동화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했다. 굳이 등산하는데 큰돈 들일 필요가 있을까? 싶었던 게 사실이다. 신발이면 다 같은 신발이지 무슨 용도까지 구별하는 건지 별스럽다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신발이란 자고로 편하고 가볍고 벗겨지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지 무슨 등산하려고 신발까지 따로 산담? 싶은 반동분자적 마인드. 평소에도 사골 고와먹듯 신발 하나만 주야장천 신었고, 운동화 하나로 해외여행도 가고 백화점도 가고 출근도 하는 등 TPO(시간, 장소, 상황)따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뽕을 뽑았던 나였으니 그런 사고방식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때 수락산 어르신들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운동화로 혼자 이산 저산 누비다가 절벽에서 미끄러져 헬기 부르는 신세가 됐을지도 모르거늘.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등산화를 사야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 등산인의 자세는 갖추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막상 등산화를 사려니 뭔가 망설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확하게는 기가 죽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도봉산 입구 스트리트에는 온통 번쩍번쩍한 고가로 추정되는 스틱이나 배낭을 울러 매고 때깔 좋아 보이는 등산복을 풀세트로 갖춘 어르신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낮 낡은 운동화를 신고 집 근처 편의점 갈 때나 입던 트레이닝복 차림의 내가 이 거리에 있어도 되는 건가 싶은 위화감이 들자 선뜻 매장 입구로 들어갈 용기가 생기질 않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질 않던가. 저 번쩍번쩍한 차림새의 어르신들도 한때는 등산 햇병아리 시절이 있었을 터. 나 또한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의 등산인이니 당당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혼자 당당하게, 조금은 뻘쭘한 채로 매장 입구에 들어섰다.


"손님 뭐 보러 오셨어요?"

"아 저 조금만 둘러볼게요~"

역시나 호탕하게 생기신 사장님께서 입장하자마자 큰소리로 내가 이 매장에 들어온 목적에 대해서 물으신다. 그리 물으신다면 등산화 사러 왔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일단은 이것저것 좀 둘러보자고요~ 매장을 가득 채운 등산용품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검은색 고어텍스 기능이 탑재된 슬림핏의 등산재킷 19만 원' 응~ 안 사,라고 속으로 튕겨보지만 지갑만 두둑하다면 시크하게 결제하고픈 양가적 감정이 교차한다. 저 재킷을 입고 날렵하게 등산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아직은 등산재킷까지 사는 건 이르지. 일단은 등산화부터 사는 거야! 마음을 다잡고 등산재킷 코너에 머문 눈길을 등산화 쪽으로 옮겨본다. 언뜻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는 외모의 등산화이지만 자세히 보면 색깔부터 디자인까지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일단은 색깔, 고동색이라고 쓰면서 똥색이라고 읽을법한 색상의 등산화부터 점잖은 검은색까지 색의 스펙트럼이 그리 다양하지는 않았다. 가끔 확 튀는 빨간색도 있었지만 좀 올드해 보이니까 패스하고, 아무래도 처음 사는 등산화는 안전하게 가야지 싶어서 무난한 색상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리고 디자인, 미리 알아본 바로는 발목이 긴 디자인을 사야 등산할 때 발목을 잡아줘서 울퉁불퉁한 돌길을 걸어도 발목이 흔들리지 않고 편하다 했다. 또 고려할 사항으로는 고어텍스, 방수 기능이 첨가되어 있을 것. 요즘 브랜드들은 기본 고어텍스 기능이 탑재되어 있으니 이건 논외로 하고, 제일 중요한 건 밑창이다. 바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접지력을 가진 등산화일 것.


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고 위 조건에 가장 부합해 보이는 등산화를 콕 찍어 사장님을 부른다.

"사장님, 저거 한번 신어봐도 되죠?"

"발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

"240이요."

"등산화는 한 사이즈 크게 신는 게 좋은데. 등산양말 신는 거 감안해서 한 사이즈 큰 걸로 줄 테니 한번 신어봐요~"

음, 처음 안 사실이었다. 평소 구두던 운동화던 신발은 무조건 240으로 신었는데 245라니 어색한 사이즈다. 그래도 등산화 하루 이틀 팔아보신 사장님이 아닐 테니 믿고 신어보자는 마음으로 갖다 주신 등산화에 발을 넣어 보았다. 역시! 조금 여유 있긴 했지만 발이 안정감 있게 느껴졌고 겉가죽이 튼튼한 게 마음에 들었다. 마치 탱크를 발에 신은 느낌이랄까? 이 탱크 같은 등산화가 돌부리도 막아주고 바윗길도 비단길로 만들어 주겠지. 신자마자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서 바로 결제를 해버렸다. 드디어 나만의 등산화가 생긴 것이다.


등산화는 처음이라 낯설면서도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이 등산화와 함께라면 어떤 산이라도, 심지어는 에베레스트라도 오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넘쳐났다. 겨우 등산화 한 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애 첫 등산화를 구비한 소회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등산화 구매는 앞으로 등산을 꾸준히 하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했던 것이다. 작심 3개월을 넘어 평생 함께하는 동반자가 될 등산이라는 취미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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