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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유의꽃 Feb 24. 2023

아프지 마, 나 다른 여자 만날꺼야!

그 남자의 당당함

열 시. 

시계를 보고 침대에 누웠다. 남편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는 일찍 잠들어야 했다. 수면 중 분비되는 면역물질이 내 몸을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암이라는 소식과 함께 찾아온 불면증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다행히 많이 좋아지고 있었지만 잠에 대해선 여전히 날이 서 있을 때가 많았다. 스스로를 돌보는 것도 아직 많이 서툴렀다.     

 

과거의 나는 남편과 아이들, 집안일이 우선이었다. 나를 위한 정성스러운 밥 한 끼는 미뤄도 되는 줄 알았다. 설거지 한번 안 해도, 피곤하면 누워 낮잠을 자도 괜찮았는데... 지인 이야기 들어주는 대신 불편한 내 마음 들여다 봐 주는 것이 우선이었는데... 나를 위한 시간을 내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세상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야 하는 줄 알고 열심히 살았다. 그래야 잘 산다고 생각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고 뒤척거림이 길어졌다. 아마도 생각이 많았기 때문인듯하다. 건강해지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니 스멀스멀 예전의 습관이 새어 나오려 했다. 수업준비를 할 때도 한 번에 몰아서 해야 마음이 편했고, 몰입할 때는 물 마시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자꾸 깜박거렸다. 집안일하고 장 본다고 중간중간 쉬어주지 못해 체력이 훅 떨어지는 일도 자주 반복됐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건 여전히 연습이 필요할 때였다. 한 단계가 끝나면 다음 레벨의 게임이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아플 때는 남편이 들어오지 않아도 일찍 잠들었는데, 몸이 나아지자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며 뒤척였다. ‘혹시 술 취해서 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과 불안함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쾅!

요란하게 문 닫는 소리와 함께 터벅터벅 발소리가 이어졌다. 걱정이 현실이 된 순간 아직 잠들지 않은 내가 미웠다.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들이 몰려왔다. 모든 세포들이 직렬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너희들도 기억하고 있구나!’ 기다려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도 많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남편의 주사이다. 평소엔 자상한 남편이 술 마시고 들어오면 붙잡고 늘어지는 잔소리에 도망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발 씻고 들어가서 조용히 자라!’ 주문 외우듯이 속으로 반복하며 이를 악물었다. 눈을 질끈 감고 이 방에 들어오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는 순간 방으로 들어왔다. 잠든 척 연기하려니 오히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제발 깨우지만 말아줘!’ 이상하게도 ‘제발’이라는 주문만 외우면 남편은 반대로 행동했다.      


그가 씻고 방으로 들어온 순간 그날도 어김없이 잔소리가 봇물 터지듯 흘러나올 줄 알았다. 어두운 방에서 그의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자는 척했다.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는 말들. ‘그냥 조용히 올라가서 자!’ ‘나 빨리 자야 해’ 수없이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런데 그 순간.... 훅 들어온 손길.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방금까지의 불안함은 안개가 사라지듯 순식간에 날아가고 ’ 기분이 좋은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남편이 말했다. 

“정혜윤, 죽는 줄 알았는데..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그 말에 순간 나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조용히 숨죽여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코맹맹이 소리로 다시 이야기하는 남편. 

“오래 살어~!! 나 자기 없으면..... 다른 여자 만날 거야!!” 그러니까 오래살어~!!!!!“  

눈물을 터뜨리며 이야기를 했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말. ”자기야, 고마워, 고마워. 나 당신 덕분에 이렇게 건강해질 수 있었어. 고마워. 진짜 고마워 “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4기 암 진단받은 후 처음으로 서로의 감정을 드러냈다. 꾸역꾸역 눌러뒀던 슬픔, 두려움, 걱정, 불안을 2년 반 만에 토해냈다.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 어두운 방에서 우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던 감정을 눈물로 쏟아냈다.     



평소에는 당연히 가족이 우선이었는데 내 몸이 아프니 신랑이 보이지 않았다. 내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기에 남편과 아이들의 안부가 희미해져 갔다. 그럴수록 우리 사이도 조금씩 멀어진 듯했다. 남편은 책임감 강한 첫째 아들이라 힘들어도 표현하지 않아서 몰랐다. 내가 없는 동안 일하고 아이들 돌보며 언제 올지 모르는 아내를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사랑하는 배우자를 잃을까 봐 두려웠을 신랑의 고통까지는 보지 못했다.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 작은 여유라는 필터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해 주었다.

’ 배우자를 잃을까 얼마나 두려웠을까?‘

’ 혼자 아들 둘 키울 생각에 얼마나 막막하고 무서웠을까?‘ 

돌아오지 않는 아내를 보며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갔을 신랑이 안쓰러웠다. 힘들었을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졌다. 솔직한 눈물이 그 어떤 말보다 진심을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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