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왜 서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나?
고등학교 때는 공부만 열심히 해서 인서울대학에 들어가면 꽃길이 펼쳐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약 6년간의 중고등학교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사회에 내 발을 내딛는 첫 시작이었다. 사람에 치여 타는 지하철과 엄청난 인파보다 더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건 바로 집이었다.
대학교에 와서 1년 간은 기숙사에 살았다. 고등학교 때도 4명이 함께 복작거리며 사는 기숙사에 비하면 2인 1실은 천국 같았지만, 소위 "똥군기" 문화를 가지고 있던 학과 분위기 때문에 선배들의 비위를 맞추고 막내라는 이유로 참여하고 싶지 않은 행사에도 필참 해야 하는 문화가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방학이 되면 갈 곳 없는 지방인은 다시 본가로 돌아가야 했다. 약 4개월을 살 수 있는 기숙사는 200만 원 정도였고 방학 때도 기숙사에 머무르고 싶다면 집을 사서 다른 동으로 옮겼다. 2개월에 100만 원이 넘는 금액에 나는 작은 방이라도 혼자의 자유가 있는 고시원으로 갔다.
통학이 힘들다고 푸념해도 나는 경기도나 서울에 본가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내 눈에는 소위 '중산층'으로 보이는 서울 친구들은 나보다도 훨씬 넓은 방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특히 자취를 하는 친구들은 때에 따라 달랐지만 부모님의 지원으로 보증금을 마련하고 월세를 지원받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수중에 50만 원도 없었고 우리 집은 여유 있는 집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보증금 없이 살 수 있는 선택지는 고시원밖에 없었다. 몸을 겨우 누일 수 있는 싱글보다도 더 작은 침대와 그보다 더 작은 바닥 공간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마저도 창문의 유무에 따라 가격이 달랐다. 레고 같은 창문이 있으면 월 25만 원, 없으면 월 20만 원. 아르바이트비로 월세를 내야 했던 나는 창문이 없는 20만 원 캄캄한 골방을 선택했다.
기숙사에서 고시원으로 이사를 하던 날은 애매한 거리로 택시로 이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끼는 옷이 들어있는 택배박스 하나를 도둑맞았다. 짐을 잠시 문 안쪽으로 들여놨는데 사라져서 망연자실했다. 눈뜨고 코베이는 곳이 서울이라더니, 사실이었구나.. 엄마가 짜준 옷들과 나름 비싸게 구비한 아끼는 옷이 통째로 사라지니 정말 우울하고 엄마한테 미안했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는데도, 학교 생활을 하며 카페 아르바이트로 벌 수 있는 돈은 한정적이었다. 월에 50-60만 원을 번다고 해도 생활비로도 빠듯했다.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친구들과 밥을 먹는 대신 고시원의 공짜 라면과 밥을 먹는 일이 허다했다. 그리고 창문이 없는 골방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했다. 매일 우울했고 한동안 잠잠했던 비염이 도졌다.
고시원은 조그만 소음도 아주 잘 들렸다. 구조 자체가 그냥 사람들 사이에 벽 하나를 세운 것뿐이라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심지어는 방귀 뀌는 소리까지도 생생히 들렸다. 코 고는 사람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하고 생각했지만 참 힘들었다. 결국 울면서 엄마에게 월 10만 원을 지원받기로 했고 나는 창문이 있는 고시원에서 6개월 정도를 더 살다가 휴학을 하고 집으로 내려갔다.
11년 동안 이사를 참 많이 했다. 강북구 수유에서 운 좋게 기숙사를 구해서 친구와 같은 방을 썼고.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와서 모은 보증금으로 1층에 위치한 세면대가 없고 하수구 바로 위 창문이 있는 4평짜리 월 40만 원 원룸에 살았다. 취직을 한 후에는 중소기업 전세대출을 받아 관악구로 거주지를 옮겼다. 창문은 하나였지만 3층에 있는 4평 방에서 1억 2천만 원 보증금을 내고 살았다. 한 방에서 울리는 냉장고 소리가 너무 커서 전기 코드를 빼고 살 정도로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 1억 5천만 원 전세대출을 받아 5평 방에서 살고 있다. 4층에 양창(창문이 2개 인 것)인 집을 구해 처음으로 소파도 놓았다. 조금씩 업그레이드가 되고 있지만 그 변화는 미비하다. 부모님은 내가 살았던 모든 집을 봤었고, 내가 이 집에 왔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방 크기가 똑같은데 보증금은 3천만 원이 더 올랐네?"
"양창이잖아. 게다가 강남이랑 지하철로 2 정거장은 더 가까워졌어..!"
"너는 이런 좁은 집에서 살면서까지 서울에 굳이 있고 싶어?"
"..."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주에 있는 내 친구들은 내 보증금을 듣고는 깜짝 놀라곤 하니까. 게다가 나는 그렇게 일하고 돈을 모아도 아직도 "원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힌다. 아직도 냉장고는 내가 자는 공간과 함께 있고 한 뼘만 한 싱크대는 설거지를 할 때마다 물이 넘친다. 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은 꿈꾸지도 않는다. 강남과 가까워졌다는 메리트는 내가 이직을 하자마자 사라졌다.
서울에서 10년을 넘게 살아도 결혼하지 않는 이상(부부는 대출금을 2명이 함께 갚을 수 있으니..!) 더 좋은 거주환경에서 살기는 힘들다. 물론 투자를 통해 돈을 불리는 멋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시드머니도 없고 부모님 지원도 없는 자취청년 사회초년생에게는 고정비와 생활비를 내는 것만 해도 빠듯하다(고 변명을 해본다).
로또 청약이라는 워딩을 클릭해 들어가면 서울에는 10억으로도 살 수 없는 아파트들이 나오고, 10평도 안 되는 집이 5~7억씩 하는 걸 보면 내가 서울에서 "방"이 아닌 "집"에서 살 수 있는 날이 오긴 하는 걸까 막막하기도 하다.
결정적으로는 25평대 복층이 있는 빌라에 6천만 원으로 첫 집 마련을 했다는 부모님의 기쁜 소식이 트리거였다. 아빠의 서재 한 칸이 나의 서울집보다도 넓었다. 내가 10년동안 노력해도 아빠의 서재 한 칸을 넘기질 못하는 구나. 아.. 역시 나는 서울은 안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