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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상 Irondenker Jun 03. 2024

이 글이 읽히면 나는 18시간 후에 사멸합니다

처지에 대한 불만족을 가장 지루하고 극렬하게 표현하는 방법

이 글이 읽히면 나는 18시간 후에 사멸합니다. 차라리 돈독(頓讀)의 시점이 사후이길 희망합니다. 이 곳에 아무런 관심도 없을 것이니 이 글은 사해의 문서처럼 묻힐 것입니다. ‘후세에 필경 그 모습이 밝혀지리라’라는 위로는 위안이 되고 또한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나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를 지탱할 자본주의적 수단(때로 사람들은 이 수단을 목적론에 천착하여 이를 헤아립니다)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비전을 창조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수단을 최대한 많이 불리라는 수단의 지시가 사람들의 뇌리에 공허하게 메아리는 탓일 거라 감히 추측합니다.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궁극적이면서 시시껄렁한 목적을 가끔 생각합니다. 그렇게 수뇌는 있으나 고뇌는 없는 삶을 살다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개체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수단은 여전히 필요합니다(이 사실을 간과하는 것은 개체 보존의 조건에 위배됩니다) 사실 나조차 삶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 역시 이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수단과 목적은 찰나의 순간에 머릿속에 쌍생성 되었다가, 그렇듯 여느 입자의 절차처럼 쌍소멸할 것입니다.


산업전선은커녕 그 흔한 시급노동 하나 해보지 못하고, 해본 적도 없고, 해볼 자신도 없고, 유사 시 내 목숨을 넘어서는 무한책임을 짊어질 각오 또한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인 나는 존재를 유지할 최소한의 수단도 불리기 어렵습니다(사실 두려움에 가깝습니다). 이는 나라는 개체의 명백한 오류입니다. 지금도 나와 나이가 비슷한 이들은 자신의 배움과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 산업전선에 뛰어들고 있습니다. 나는 이를 바로잡고 나를 전선에 뛰어들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성숙한 벗(사실 구세주의 성질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음이 웃음을 자아냅니다)을 찾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의 삶을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고,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럴 가치도 없습니다. 타인에 의한 구원은 없으며, 없어야한다는 나의 사상과 정확히 모순되며, 자신의 정체성을 담당하는 사상도 지키지 못하는 개체는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삶을 대하는 비전과 진정성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반지를 감싸는 포장지와 같습니다. 나는 반지를 모신 적도, 가진 적도 없습니다. 그저 공기에 존재하는 금과 백금 분진을 폐포를 불려 포집하여, 그것을 반지로 착각해 포장지에 쌓아두었다가 시대의 바람에 날려보내기를 수차례 했을 뿐입니다. 고갱이가 없는 삶이란 그 자체로 흔들리는 것이 당연지사입니다. 삶의 어느 상황에서도 진정성을 보이지 못한 사람은 그저 도태될 뿐입니다. 시도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먼지와 뒤섞인 질낮고 지리멸렬한 것 뿐이었으며, 금속의 알갱이는 정말 없는 것에 가깝습니다.


남은 것은 학업입니다. 학창시절엔 나를 지켜주던 방패이자, 여전히 별볼일 없었지만 할 줄 아는 것 없던 나에게 있던 유일한 장기였습니다. 이제는 그것조차 못합니다. 석사 이상의 길은 단념한지 오래이며, 이제는 산업체에 나를 잘 보여줄 수 있도록 단장하는 것만이 나의 공부의 전부가 되었습니다(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공부는 이미 삶을 대하는 비전과 비슷한 전철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금년의 성적은 그러지 못합니다. “내가 옳고 평가가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 애초에 진리를 이해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걸까요? 수많은 재능과 그에 대한 담론이 제 주변을 지나갑니다.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믿긴 하지만, 여전히 노력은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제는 생각이 다릅니다. 노력의 기여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게 유의미한 수준의 기여도를 가지는 것이 맞긴 한걸까요? 재능이 있는지도 흥미가 있는지도(두 척도의 상관관계는 높은 것으로 보이나, 일단은 독립시행 요소로 가정합니다.) 확실하지 않은 판에 내가 무엇을 더 노력해야하나요?


위의 세 기준 중 하나도 충족을 못하고, 외모 역시 충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충족이유율입니다. 아직 내리받는 것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베풀어주고 싶습니다. 그게 친구면 좋고, 연인이면 더 좋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없습니다. 내 영역 안으로 들어온 사람을 그들이 만족할 때까지 살갑게 대해주는 것도, 그들에게 진정하게 공감해주는 것도, 그들의 허물까지 사랑해주는 방법도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기회조차 없습니다. 나를 감싼 살은 두껍고, 내 코는 내 윗입술과 높이가 같으며, 피부는 원인조차 모르고 썩어들어갑니다. “죽을 의지가 있으면 그 의지로 감량을 하고 노동의 대가로 의학적 단장을 획책하라”라는 말은 분명 도움이 됩니다. 근데 도움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많이 들었고, 이제는 도움조차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나약해졌다는 생각 뿐입니다. 위의 모든 내용을 차치하더라도, 나는 사랑을 그저 학습된 의지로, ‘경험’으로써 아주 가볍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태까지 내가 남긴 말을 구어체로 줄이고 이만 줄일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일해본 적 없고, 할 의지도 없고, 목표도 없고, 공부도 못하고 부모의 등골이나 휘게 하던 불효자식이 죽고나서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는 그의 유서가 뒤늦게 인스타그램에서 발견되다.” 입니다. 인분을 보고도 구역질을 참는 여러분들의 비위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여러분들이 글을 확인한 후에도 이것이 자동으로 지워지지 않은 것에 대한 깊은 통탄을 느낍니다(느꼈습니다). 그것은 자동으로 치워지는 분변과 시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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