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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현 Feb 23. 2021

분화

비산6

K는 간호사에게 물건을 전하고 나오면서도 말 랩실에서 부교수를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간호사가 병원 방침대로 제약사 영업대표를 교수진으로 떼어놓기 위한 메뉴얼에 불과한 것처럼 생각했고, 면담으로 예정되었던 시간에 딱히 해야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아 별생각 없이 랩실 문을 두드렸다. 외부 출입이 드문 연구실에서 방문자를 졸업 연차 정도 되어 보이는 레지던트다.


연구실 생활만을 면서 때가 묻지 않아서 그런지 K가 누군지 관계없이 시종일관 공손했지만 부교수가 내부의 풍동에서 정말 실험에 열중하고 있어 바깥에서 들리는 인기척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K는 레지던트에게라도 병원과 관계된 정보를 얻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대부분 다른 병원과 다름없는 일반적인 답변밖에 들을 수 없었다. 그나마 자신만 아는 이야기라며 신이 나서 떠들었던 내용은 병원 의료진 중에 병원 재단의 설립인 자녀가 있는데 정작 이사회나 교수진들은 누구인지 몰라 인턴이나 레지던트들에게도 평소 조심스럽게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교수도 아닌 일개 레지트가 농단 삼아 던지는 이야기라 재미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믿기지는 않는 터라 K는 그 설립인 자녀가 누군지 신경이 쓰고 싶지 않았고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렇지만 일을 하다 보면 만나야 하는 사람들 중에 영향력을 감춘 누군가 있다는 것은 K도 병원을 상대로 하는 영업을 위해서 로비를 해야겠다라기 보다는 이사회나 교수진들처럼 잘못 보이는 경우는 없도록 하기 위해 병원 관계자 만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되뇌었다.


'그나저나 실험은 언제나 끝?'

처음 보는 레지던트와 나눌 이야기 소재도 바닥이 날 때쯤까지도 부교수는 풍동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K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 출입문을 힐끔힐끔 보고 있을 때쯤 풍동 쪽 출입문이 열리고 부교수가 나왔다. 누군가 얼핏 봐도 의사 같다고 생각할 것 같은 첫인상의 부교수는 K의 방문은 의식하지 못한 채 차트에 실험 결과를 쓰기에 바쁜 듯했다.

"오 닥터 어제 했던 배양 기록이랑 오늘 거랑 비교해서 원인분석 좀 해줄래? 배양액 차이인지 결괏값이 2~3배 나는 것 같아. .. 손님이 계셨네?"

" 컨설턴트 후임으로 온 고재건라고 합니다"

" 컨설턴트요?"

"에거 코리아."

"그렇군요. 며칠 전 식사 자리에는 프로젝트가 막바지라 참석 못했네요. 미안합니다."

"천만에요. 이렇게 바쁘신 줄 솔직히 몰랐습니다."


교수는 실제로 바빠 보인다는 말을 듣고 적지 않게 만족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그렇K의 이름을 단번에 기억줄 것이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웠다. 다만 다음 기회에는 실낱같은 기억을 되살려 고재건라는 이름이 떠오르기만 하더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K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연고를 교수에게 덧붙였다.

 

"참고로 전 제주에 흔하디 흔한 제주 고씨입니다"

"아, 그렇군요..."


K는 이런 소개가 보통 대화 길게 이어지게 할 수 없소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자신을 상대방에 각인시킬 요량으로 초인 클라이언트에게 써왔던 방법이었다. 교수는 역시 여느 이야깃거 그렇듯 일상적으로 반응하는 듯했지만 이내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레지던트에게 고개를 돌려 반가운 듯 물었다.


"오 닥터, 오 닥터 조부모님들도 제주도에서 크게 농장을 한다고 안 했니?"

"네, 그렇지만 말씀처럼 크게 하시는 건 아니고요."

"응, 고 컨설턴트님 제주 연고시니까 오 박사가 연락 좀 잘 받아줘. 알겠지?"


이런. 예상과는 다른 전개로 K는 적잖게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의약품위원회 로비를 위해 연구실을 찾았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부교수 연락처를 따로 요청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상황 파악쯤은 K 자신의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망감은 말할 나위 없이 컸지만 그렇다고 딱히 구를 탓할 상황도 아니었기에 K는 색하고 적막한 상황을 자연스러운 대답으로 넘기고 싶었다. 그렇다고 무렇게 너스레를 떨만한 관계도 아니었기에 K는 부교수의 부탁을 받은 레지던트에게 명함을 내밀며 이야기했다.


"병원 건너편 신축 빌딩에 저희 회사 원격 사무실이 있어요. 편한 시간에 연락 주시면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명함을 들고 있던 레지던트의 손을 향해 있던 K의 시선 잠시 부교수에게 향했다가 이내 레지던트에게 돌아갔다. 레지던트는 신기한 듯 K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제약사 영업 담당에 대한 호기심일 뿐, 그에게 K는 담당 교수 지시종종 연락을 해야 하는 부가 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보통 오전엔 회진, 오후엔 랩실에 찾아오시면 돼요"

"오 닥터님께도 제 명함을 드려야겠네요. 여기."

"루에거..."


회사명을 확인하는 것인지 문의하는 것인지 말끝을 얼버무리는 레지던트는 제약사 영업담당에게 꽤나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그렇지만 담당교수가 옆에 있는 데다 그의 책상 위에 두껍게 쌓여있는 실험노트들로 미루어보아 처리해야 할 랩실 업무도 만만치 않아 보였기에 오랜 대화 편하지 않은 듯했다. K는 솔직히 레지던트를 더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고,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른다 해도 더 질 게 없을 것 같아 사실 있지도 않은 본사 판매실적 관련 정규회의 일정 계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


"저는 이제 곧 란드 본사와 판매실적 회의가 있어서 가봐야겠네요. 차주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시군요? 루에거 본사가 폴란드였군요?"

"네, 제는 다국적 제약사지만 설립 초기인 20세기 중반 르샤바  허름한 건물에 연구원 몇 명이 전부였지요."

"이제는 업계에서 꽤나 유명하죠... 그런데 소문보다 꽤나 부지런하네요. 아침 7시부터 회의라니."


대충 둘러대자리를 뜨려던 K는 사실은 관료적이기 이를 데 없는 본사 지원팀을 면하고 유연한 조직으로 억지로 포장했지만 이내 스스로가 불편해져서 급히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병원문 밖을 나서니 아직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서 내리쬐고 있어 오래 서있을 수도 없었다. K는 비어버린 일정으로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들렀던 근처 카페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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