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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체리 Jun 09. 2020

 단짠단짠, 육체노동의 매력에 빠지다

                                          

몸은 머리보다 솔직하다



몸으로 먹고사는 사람은 팔짱 끼고 자신을 부리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생각이나 눈으로는 쉬워 보여도 막상 몸으로 그 기대를 실현해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허혁의 책 <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중에서-     




실습생인 나의 직속 사수로 스물다섯 살의 직원이 배정되었다. 우리 딸보다 겨우 다섯 살이 많은 상사를 모시려니 죽을 맛이었다. 출근하면 가장 먼저 사수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그러면 그는 주삿바늘 눈금에 시선을 고정하고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시크하게 오늘의 업무를 지시한다.  

    

" 먼저 바이탈부터 하세요."

"오늘 바쁘니까 10시까지 업무 빨리 완료하고 보고하세요"     


실습생들끼리는 나의 상사를 FM이라고 불렀다. FM에게 걸린 나를 모두들 애도하는 분위기였다. FM의 특유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한 나는 대학신입생 시절 해병대를 굴러먹다 막 전역한 복학생 선배의 눈빛과 마주친 느낌이 들었다. 기라면 기고 까라면 까야한다.    

   

FM이 지향하는 3대 모토는 정확, 정직, 신속이다.(어쩌면 배달 음식점의 모토와 비슷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머리와 손이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나이까지 많은 나는, 정확과 신속의 덕목에서 특히 취약했다. 물건을 정해진 위치에 놓지 않거나, 짧은 시간 내에 주어진 처치를 하지 못해 사수에게 깨지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눈앞에 번쩍거리는 섬광이 나타나더니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편두통이 약 20여 년 만에 재발한 것이다.  FM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치 눈이 뒤통수에 달린 듯 감시하고 있다가 날카롭게 지적하는 바람에 나의 신경이 과도로 긴장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너무 긴장해서 FM이 가지고 오라고 시킨 물품이 오직 내 눈에만 안 보이는 이상한 경지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신혼시절 내 손만 보고 있는 시어머니 앞에서 의식적으로 조신하게 사과를 깎으려다가 그만 사과가 로켓처럼 날아가 시어머니 코앞에 떨어진 일 있었는데, 그때 사람은 긴장할수록 더욱 멍청한 짓을 저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배워보겠다고 덤비는 늙은 내가 불쌍했는지 채찍질만 하던 FM이 한 달 반 정도가 지나고부터는 당근을 먹여주기 시작했다. 정직, 정확, 신속의 덕목을 잘 지킬 때마다 칭찬을 해주는 것이다. 아메리칸식 개방적 마인드의 소유자인지, 아니면 노예근성의 소유자인지 몰라도 당근 맛을 본 나는 그가 시키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고 간신히 초보 기술 몇 가지를 마스터하게 되었다.

           

그동안 머리로만 먹고살던 나에게 육체노동의 '도제식 시스템'은 신선했다. (아니, 신선이라고 쓰고 충격이라고 읽는다) 경력자 한 사람이 신입 한 명을 전담 마크하여 시범을 보이고 수행을 점검해주지 않으면 결코 단 하나의 기술도 익힐 수 없는 구조이다.



그리고 드디어 스물다섯 살의 어린 사수 옆에서 채찍을 받아내고 당근을 씹어가며 두 달을 견딘 끝에 비로소 생각과 몸이 일치하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몸으로 먹고 살기'를 시작한 지 삼 개월, 몸은 고달프고 여전히 머리와 몸은 가끔씩 따로 논다. 그러나 요즘 들어 '몸', 이 녀석의 솔직함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머리로 공부만 할 때는 수없이 배신을 당했다. 그래서인가 '너 정말 못해'라고 직설적이고 화끈하게 말해주는 이 녀석이 고맙기까지 하다. 머리가 진작 나에게 이렇게 솔직했더라면 매년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지고 시험에 매달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소파에 널브러져 누워 있다보면 무념무상의 세계로 빠진다. 직장 걱정은 직장에서만. 지금은 힘들었던 나의 몸을 위로할 때라고 녀석이 나를 다독여준다.


언제는 마음대로 몸이 안 움직인다고 혼내더니, 지금은 마음과 몸을 분리하란다. 이상한 놈. 단짠단짠에도 능한, 내 사수를 닮은 이 녀석이 제법 괜찮은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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