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이가 간호대학에 진학했다. 영어교육을 전공한 강민이는 임용고시는 딱 한 번 봤다고 했다. 단 한 번으로 시험을 끝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자 강민이의 답은 명쾌했다. 임용 시험은 자신에게 맞지 않았단다. 간호학원 실습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적성이 간호분야에 더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된 강민이는 대학 입시에 도전하였고 합격했다.
나는 왜 진작 다른 일에 눈을 돌리지 않았던가
시험은 나이 제한이 없으므로 나이가 많아도 응시에 불이익이 없다. 그러나 직장은 그렇지 않다. 늦은 나이에 입사 도전을 하기에는 많은 제약이 존재했다. 블라인드 채용이니 뭐니 해도 여전히 기업에서는 대리나 과장보다 나이 많은 신참의 입사를 반기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더욱 공부에 매달렸다. 마흔이 넘어서자 이미 정규직 신입으로 입사할 가능성이 사라졌고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공부와 비정규직뿐이었다.
그래서 단 한번 시험으로 임용고시를 접었다는 강민이의 말은 신선했다. 부모님의 기대 혹은 실체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자신의 욕망보다는 현실적인 승패 가능성을 꼼꼼히 따져본 강민이는 똑똑했다. 그리고 일찍 포기한 만큼 더 많은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인생이란 가끔 변덕스럽게 배신을 때린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불리할 때는 재빠르게 치고 빠져야 한다. 우직하게 자신을 믿고 기다리는 것과 승산이 낮은 게임을 대안 없이 붙들고 있는 것은 다른 문제다.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합격한다.'
수험생 시절에는 이 말이 진짜인 줄 알았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은행의 번호표처럼 내 순서가 올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말은 그냥 희망고문일 뿐이다. 십수만에 합격했다는 전설의 인물이 합격수기를 올렸을 때 많은 수험생들은 열광했다. 포기만 하지 않으면 십 년 혹은 십이 년 동안 공부해서 지쳐서 쓰러질 순간에 기적같이 합격을 거머쥘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부 삼 개월 만에 합격했다는 수기를 올렸다가 잘난 척한다고 쌍욕을 얻어먹은 수험생처럼 그 또한 알고 보면 1% 확률의 희귀한 케이스일 뿐이다.
수험 생활 막바지에는 패전의 그늘이 내 머리 위에 드리워져 가고 있다는 것을 나도 느끼고 있었다. 초수 시절 비해 머리 회전도 느려지고 체력도 떨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반복되는 패턴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공부를 오래 할수록 똥고집이 세져서 다른 사람의 말은 잘 듣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나름 장수생 부심(?)을 가지고 문제를 풀지만 초수생의 답안보다 형편없는 답안을 써 놓았던 적도 많다. 일명 삽질 답안 말이다. 시험의 경향은 매년 바뀌는데 나는 점수가 가장 잘 나왔던 바로 그해의 공부법을 고수했다. 그러는 동안 쌓인 것은 실력이 아닌, 아집이다. 삼수 사수가 넘어서면서 조금씩 합격이 어려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묵은 욕망일수록 떠나보내기가 힘들어진다. 삼수만에 시험을 포기했다면 열 줄이면 끝날 이 글을 이렇게 구구절절 길게 쓰고 있으니 말이다. 시험에 대해 내가 강민이처럼 한마디 말로 가볍게 받아쳐 넘길 수 없는 것은 시험이 나에게 깊은 상처와 열등감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탁탁 손을 털어버리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포기한다고 해서 빈털터리로 벼랑 끝에 서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시험공부를 막 시작했던 서른세 살의 내가 미리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번호표 속의 번호는 불리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잠시 화장실로 뛰어갔을 때 하필 내 번호를 부를 수도 있다. 아니면 대기 손님이 너무 많아서 기다리다가 지레 지쳐버려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콩나물시루처럼 빼곡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숨 막히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언젠가는 불리겠지라는 생각으로 번호표를 뽑았던 내가 잘못이다. 애초부터 한가한 옆 은행으로 가는 것이 옳았을 수도 있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