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으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시계를 보니 5시 50분. 퇴근 시간 10분 전이다. 환자가 병원까지 오는 시간, 진료 접수를 하고 원장님과 상담하는 시간 등을 모두 고려하면 총 20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퇴근 시간인 6시가 넘게 된다.
나는 오늘 진료가 마감되었으므로 다음에 내원해달라고 말씀드렸다. (보통 5시 40분이면 진료 마감을 한다)
40대 정도의 여자 환자분은 약간 짜증이 묻은 목소리로 몇 번이나 지금 가면 안되냐고 물었고 나는 다시 한번 진료 마감을 안내했다. 환자는 알았다며 툭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갑자기 병원 문이 열리고 환자가 들어왔다. 아까 전화를 했던 그 분이었다. 그때 우리는 막 퇴근을 하려던 참이었다. 병원 조명도 모두 끄고 메인 컴퓨터도 로그아웃 중이었다. 그분은 자신은 바빠서 병원에 올 시간이 없고 지금 당장 꼭 원장님과 상담을 해야하니까 진료 접수를 빨리 해 달라고 했다. 할 수 없이 허겁지겁 컴퓨터를 재부팅했다.
그런데 진료실에 들어간 그분은 한참 동안 당최 나오질 않았다. 병원 벽시계의 분침은 이미 6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밖에서 얼핏 듣자니 환자분의 끊임없는 질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원장님과 인생 상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긴 진료를 끝내고 드디어 환자가 나왔다. 시계를 보니 6시 반, 퇴근 시간을 30분 넘긴 시간이었다.
환자의 표정에는 목표를 달성한 만족감이 비쳤다. 그는 느릿느릿 지갑을 열고 한참 동안 결제할 카드를 고른 후에 천천히 진료비를 수납하고 유유히 병원을 빠져나갔다. 퇴근 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약속시간을 놓쳐서 빡친 내 눈에는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의도적인 슬로 모션으로 보였다.
그 다음 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 날은 점심시간이었고, 나는 당직이라서 혼자 병원 대기실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는 5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 급한데 처방전 빨리 줘요."
당장 처방전 내놓으라는 말을 들어도 이제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병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시에 "여기 처방전 빨리빨리"를 외치는 분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지금은 점심시간이어서요. 진료는 두 시 이후에나 가능합니다."
"아니 진료는 무슨 진료야, 지금 컴퓨터로 바로 뽑아주면 안 돼?"
음... 이런 말에도 별로 동요하지 않는다. 처방전은 의사만의 권한인데, 대기실 프린터에서 쑥 나오니까 직원들이 막 뽑아줘도 되는 줄 아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흠흠.. 날 언제 봤다고 이분 반말이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갑자기 날아온 반말에 상처 받을 짬밥도 이미 지났다. 정작 내가 놀란 것은내 말에 대한 환자의 답변이었다.
"원장님이 뽑아주셔야 되는데 지금 점심 식사하러 가셨어요."
"그래? 원장 방금 식당으로 올라가는 거 봤는데, 그럼 내가 가서 처방전 달라고 말하지 뭐."
엥? 이건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구내식당으로 올라가서 이제 막 주걱으로 밥을 푸고 있을 원장에게 처방전 내놓으라고 요구하겠다는 말씀?
환자분의 계획이 너무 신박해서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으나, 막 계단을 올라가려고 걸쳐 놓은 그의 오른쪽 발을 보는 순간 그의 의도가 파악되었다. 다급히 환자분을 불러 다시 한번 지금은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강조해 보았으나, 그분의 입에서는'당장 처방전을 받아야겠다, 잠깐 내려와서 처방전 내려주는 게 뭐 그리 어렵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환자는 말릴 틈도 없이 잽싸게 따다다 다 소리를 내며 구내식당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오 분쯤 후에 원장은 음식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내려와서 처방전을 내려주고 올라갔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놀란 것은 '사람들의 이기심'에 관한 것이다. 특히 '시간'에 대한 그들의 무례함을 경험하면 인간에 대한 회의감까지 든다.
처음엔 자신의 출근 시간이 임박했으니 순번보다 빨리 진료실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우기는 분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 정도는 애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 굶고 왔으니 지금 당장 내시경 검사를 해달라고 떼쓰는 분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예약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예약자 우선이니 님은 제일 마지막 순서라고 안내해 드리면 그들은 보통 약 한 시간쯤은 얌전히 기다린다. 그러다가 "왜 빨리 나 안 넣어줘"라며 십 분에 한 번씩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를 들볶는다.
문제는 그런 분들이 대체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그분들은 우리가 자신들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눈을 부릅뜨고 입에서 거친 말을 쏟아낼 수 있는 무기를 지닌 그들은 이미 승리자다. 인간으로서의 모멸감을 느끼며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들에게 져 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미 승패가 정해진 게임이다. 그리고 게임의 위너가 된 그들은 곧 당당히 남들보다 더 일찍 진료실에 들어가거나 내시경실 베드에 드러누울 수 있게 된다.
처음에는 이 작은 진료 대기실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함을 겪을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에 확 하고 불이 솟구쳤다. 그러나 이제는 타인의 시간을 빼앗을 권리도 진료비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의 시간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시간도 존중되어야 한다' 말한다면 그들은 '왜? 뭐가 문제야? 내가 뭘?'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당장 원장에게 달려가 "저 안경 쓴 아줌마 직원이 날 가르치려고 든다"며 꼰지를 것이다. 그러면 병원 매출 하락을 걱정하는 원장에게 불려 들어가 20분 정도의 훈계와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마인드 콘트롤 중이다 .....세상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이 있다고, 오늘 내가 그중 좀 특이한 사람을 만났을 뿐이라고, 그들은 일부러 우리를 곯려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타인에 대해 둔감한 사람일 뿐이라고.그들은 나와 다를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