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꿀체리 Oct 09. 2020

식당에 가서   
벨을 누르지 않는 이유



병원에서 일하면서 생긴 두 가지 버릇이 있다. 하나는 식당에서 테이블 위의 호출벨을 웬만해서는 누르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커피숍에서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 서서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병원 문을 열면 이미 대기실은 시골 시외버스 대합실이 되어 있다. 아침잠이 없는 어르신들이 우리보다 더 일찍 병원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어르신들의 "이제 왔어?"라는 말을 시작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다.

이렇게 노인 환자가 많은 동네 병원의 특성상 우리는 환자 한분당 좀 더 많은 시간을 야 한다. 어르신들은 궁금한 것이 많아서 질문을 많이 하고, 우리의 설명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해 여러 차례 되묻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찬찬히, 큰 소리로 여러 번 설명을 해 드린다.



그렇게 우리가 어르신 환자 한 분씩을 전담 마크하고 있을 때면 꼭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보통 육십 대 정도 되는 중년 남성들이다. 그들은 미리 작당모의를 한 것처럼 똑같은 행동 패턴을 보인다. 일단 그들은  데스크 앞에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노려본다. 어르신들에 대한 내 설명이 조금 길어질 것 같은 낌새가 보이면 그들은 두 번째 행동을 개시한다. 데스크 위에 놓인 환자 이름 적는 노트를 일부러 '탁탁'소리를 내며 치는 것이다. 그리고는 내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그 짧은 틈새를 낚아채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 이름은 아직도 화면에 안 뜨는 거야? 접수한 지가 언젠데?"

.




그들은 가끔 중년 여성일 때 드물게는 젊은 여성일 때도 있다. 나이가 어떻건 간에 그들은 마치 엉덩이에 종기가 난 사람들처럼 병원에 구비된 안락한 소파에는 절대 앉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는 우리를 염탐하듯 데스크 앞을 어슬렁거린다. 그러다가 키보드 위의 우리의 손가락이 일 초라도 머뭇거리면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왜 자신의 이름을 빨리 접수하지 않느냐고 호통을 치곤 한다.







동네 병원에서 일하려면 멀티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미처 몰랐다. 눈과 입으로는 환자에게 설명을 하면서 동시에 손으로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릴 정도의  스킬을 구비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나는, 마흔 후반이 되어서 처음 병원일을 시작한 나는, 안타깝게도 젊은 직원들에 비해 멀티가 잘 되지 않았다.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경험 부족인지, 그것도 아니면 긴장을 잘하는 성격 탓이지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던 한꺼번에 여러 일을 처리해야 할 상황이 닥치면 머릿속이 하얘져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여기저기 망둥어처럼 뛰어다니다가 일을 끝내기도 전에 진이 빠지곤 했다.




그래서인 것 같다. 식당에 가서 테이블 위의 호출 벨을 잘 누르지 않게 된 것은. 그리고 카페에서 커피가 나올 때까지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게 된 것은. 그 식당과 카페에서 일하는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몹시 바쁜 갈빗집에 가족들과 간 적이 있었는데, 종업원들은 빼곡한 테이블 사이를 곡예하듯 뛰어다니고 있었고 홀에서는 쉴 새 없이 딩동 딩동 소리를 내며 호출벨이 울리고 있었다. 마침 세팅된 반찬 중 한 개를 다 먹어서 우리도 벨을 눌러야 되는 상황이 되었는데, 병원에서의 내 꼴이 생각나서 나는 차마 벨을 누르지 못했다. 대신 다 먹은 반찬이 세 개쯤 모였을 때 마침내 옆을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조용히 손을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먹고 싶은 반찬을 나중에야 받아 든  아이들에게 '참, 엄마는 피곤하게 산다"는 타박을 들었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고객을 상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속에 저마다의 번호표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번호표라는 것은 고객의 순서가 바뀌지 않도록 처리하는 각자의 방법을 말한다.


병원에서 일하는 나에게는 '환자 명부'가 번호표가 된다.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 주문 전표'일 수,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테이블 번호' 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보이지도 고 뽑을 수도 없지만, 그들의 번호표를 믿고 기다린다면 순서대로 내 이름이나 번호는 반드시 불려질 것이다. 만일 그가 조금 늦어지고 있다면, 내 이름 불려지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걸리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른 고객의 요구를 좀 더 디테일하게 해결해주는 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병원 일은 힘들다. 나처럼 늙은 신입이 겪어 내기는 더 힘들다. 그러나 나는 이 경험을 통해 조금씩 타인에 대한 믿음과 배려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타인을 기다려 주면서 나의 급한 내면을 다스리고 있으므로 결국 그것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의 시간을 빼앗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