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노을포럼
10일의 해방을 품고 간 이름, 양순모
동해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 이야기
글 | 조연섭_ 문화기획자, 이야기 수집가, 브런치스토리 작가
“그의 해방은 단 열흘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을 백 년이 가도록 불러야 한다.”
2025년 4월, 동해문화원 소속 동해역사문화연구회가 주관한 노을포럼의 주제는 생소했지만 묵직했다. ‘양순모’. 강동수 전문위원이 단상에 서자 공간이 달라졌다. 동해 비천동에서 태어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북경까지 건너가 항일투쟁에 나섰던 이름. 그리고 해방된 조국 땅에서 10일을 살아낸 후, 숨을 거둔 이의 삶이 조용히 펼쳐졌다.
잊힌 이름, 그러나 불러야 할 이름 양순모(1905~1945), 동해 비천동 출신이다. 그의 이름을 우리는 왜 지금에서야 부르는가?
강의를 담당한 강동수 위원은 발표 서두에 이렇게 말했다.
“나만 알고 남이 모르면 그건 사회의 악이 아니라, 사회의 큰 손실입니다.”
그는 양 지사의 조카 양지국 씨를 직접 만나고, 보존된 재판 기록과 신문 기사, 국가보훈처 공적조서를 바탕으로 지사의 생애를 복원했다.
그의 발자취는 조용하지만 깊고 단단했다. 서울 유학,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활동, 북경 반제국주의 국제연대 활동, 의열단 김원봉과의 교류, 일제의 감시와 체포, 투옥,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망명자. 그의 삶은 오로지 독립의 두 글자에 매달렸다.
동해 비천의 청년, 세계를 품다
1920년대, 애국지사 양순모는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계열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조국을 떠나 북경 허베이대학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는 국제반제동맹에 참여한다. 이 조직은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결성된 국제 좌익연대체로, 식민지 해방을 위해 조직된 국제적 항일 연합이었다.
그는 국제회의에 조선 대표로 참석한 선배들처럼, 베이징에서 사회운동을 이어갔고, 노동절과 국치일(한일합병일)을 맞아 거리에서 조용히 항일 메시지를 나누었다. “한 청년이 세계사에 접속되는 지점”이라 평할 만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그리고 열흘 뒤, 그는 해방의 순간을 춘천에서 맞았다.
그리고 정확히 10일 뒤, 1945년 8월 26일, 숨을 거뒀다.
이름 없는 죽음이었으나, 그 삶은 이름보다 무거웠다.
그가 미처 누리지 못한 광복의 꿈은 후대의 몫이 되었고, 199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했다.
기억의 지도 위에 ‘양순모’를 새기다
동해역사문화연구회의 이번 포럼은 단지 한 지사의 생애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강동수 위원의 발표는 “기억의 지도”에 한 점을 새기는 일이었다.
지역의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를 되살리는 일, 그것이 동해라는 도시가 지닌 역사적 책임이자 미래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양순모, 우리가 다시 부르는 이름
강 위원은 마지막 슬라이드에 양 지사의 교복 차림 사진과, 투옥 후 찍은 수인복 차림의 사진을 나란히 띄웠다.
하나는 꿈을 품은 청년의 얼굴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된 현실을 견디는 투사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두 사진 모두 똑같은 시선을 품고 있었다. 조국을 향한 시선.
우리는 이제야 그 시선을 마주한다.
그리고 늦었지만, 부른다. “양순모 지사님, 동해가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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