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카프카의 골목길> 제8신

by 윤지형

내가 붙인 내 별명의 하나는 ‘길치’다. 길치. 음치란 말에 빗대어 은어처럼 만들어 쓰는 말인 줄 여겨왔는데 이게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말인 줄은, 무식하게도 최근에야 알았다. ‘방향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 쉽게 길을 잃거나 잘 찾지 못하는 것’. 사전의 친절한 뜻풀이다. ‘치(癡)’는 ‘어리석다, 미련하다’란 뜻이지만 ‘치매’에도 쓰는 한자이고 보면 길치란 그냥 웃어넘길 이름은 아닐 것도 같다.


내가 길치인 것과는 달리 아내는 완전 반대인데 (이땐 눈 밝을 ‘철(瞮)’을 써서 ‘길철’이라 하면 될까?) 이건 정말이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아내의 치맛자락만 잡고 가면 길 잃을 염려는 없으니까. 하지만 ‘길철’은 ‘길치’의 심정을 몰라줄 때가 많다. 아니 정말 모른다. “도대체가, 어떻게 늘 가던 길을 못 찾아요?”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아내를 이해시키기 위해 내가 궁리해낸 말은 길치를 문맹자에 비유하는 것이었다.


“당신, 글 모르는 사람의 심정, 상상은 해 봤어? 불어는커녕 알파벳도 모르는 사람이 파리 한복판에 떨어졌다고 생각 한번 해 보라구. 그냥 캄캄한 거야.”


카프카 문학은 실종, 추방, 고독, 출구 없음 등에 관한 질문이고 증언이라고들 한다. 이걸 달리 말하면 ‘길 잃은 자들의 이야기’쯤 되지 않을까? ‘길치’의 속내 이야기랄까.


《성(城)》은 산정의 ‘성’에 이르는 길을 끝내 찾지 못하는 측량기사 K의 이야기고,《소송》의 요제프 K는 어느 날 갑자기 체포되지만 자신을 옥죄어 오는 ‘소송’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커녕 거리에서 개죽음을 당한다. 길을 잃은 채!《실종자》의 첫 장인 <화부>도 그렇다. 마침내 뉴욕 항에 도착한 독일 청년 카알은 여객선에서 내리는 행렬 속에 있다가 우산을 객실에 두고 온 게 생각나 되돌아가다 길을 잃고 마는데, 결국엔 우산도 못 찾고 트렁크까지 잃어버린다.


내 친구가 그랬다면 너, 치매 아냐? 놀렸을 지도 모르지만 실은 여객선 안에서의 카알을 닮은 것은 바로 나다. 골목길을 두 번만 꺾어 돌아도 방향감을 상실하고, 백화점에 들어갔다가 출구를 찾지 못해 허둥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이다. 손 안의 구글 지도? 그것도 내겐 무용지물에 가깝다. 독도-지도 읽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나도 구글 지도에 나타난 평면의 지도를 펴서는 약속 장소로 가는 경로를 짐작하거나 상상을 해 보기도 하지만 그게 길 찾는데 도움이 된 적은 거의 없다. 막상 현장에 가면 내 상상의 지도와는 모든 게 딴판이 되고 마는 것이다. 평면에서 입체로 솟아오른 거리는 너무나 낯설고 나는 공포를 느낀다. 내가 찿는 길이 무슨 밀림지대도 아닌데다 네거리 모통이마다 큰 건물이 표지판처럼 우뚝우뚝한, 도시의 잘 정돈된 거리임에도 말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문학 공부에 열을 올리던 청년 시절 감격적으로 만났던 게오르그 루카치. 그의《소설의 이론》에 나오는 첫 대목이다. 이건 물론 나 같은 ‘길치’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다. 루카치는 ‘세계와 자아, 천공(天空)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이 하나일 수 있었던/있었을 완벽한 어떤 시대를 상정하며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니까. 그렇지만 이 같은 그의 말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를 적이 안심시킨다. 아, 길 잃을 염려는 조금도 안 해도 되는 세상, 어떤 타향도 고향만 같은 그런 세상이라니, 길치들에겐 둘도 없는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내가 길치인 줄도 몰랐던 열아홉 살 때의 일이다. 꿈속에서 나는 검푸른 우주의 광대한 허공을 걷고 있었다. 멀리론 별 하나가 부서질 듯 반짝였고 그 별은 내가 마침내 닿아야 할 곳이었다. 말하자면 꿈의 고향이었고 궁극의 나라였다. 도스토에프스키와 니체, 헤르만 헤세를 읽으며 진리란 무엇인가, 되묻곤 했던 날들, 나는 파스나 아이나 같은 결핵 약을 한 주먹씩 먹으며 결핵성 늑막염과 싸우는 중이었다. 몸은 한없이 무겁고 신경증에 불안, 불면증이 나를 괴롭혔었다. 그러나 그날 꿈속의 내 몸과 마음은 둥둥 가벼웠고 자유였다.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일은 별을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온갖 번뇌의 말끔한 소멸이랄까! 그랬기에 문득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내가 오른팔을 부드럽게 감싸며 동행하기 시작했을 때도 나는 앞만 보고 걸었다. 옆도 뒤도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내 가슴은 마냥 벅찼고 그 누군가가 누구든 나는 그와 하나라는 느낌은 너무 강렬해서 내 입에서는 절로 오, 나의 동반자여, 영원한 진리의 동반자여,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었고, 자연 두어 걸음을 앞서게 된 동반자의 등짝이 내 눈을 가로 막았다. 누구냐. 넌 누구냐. 나는 가차 없이 손을 뻗어 정체불명자의 어깨를 잡고 홱 돌려세웠고, 공포와 함께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아니 그 직전에 간단없이 우주의 나락으로 추락했었다……. 놈의 얼굴을 나는 보았던가? 그 후로 나는 그 꿈을 떠올려보곤 했지만 그 얼굴은 도무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나이가 한참 더 들어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무서운 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꾼 적이 있다. 어머니의 실종에 관한 꿈이다. 딱히 스토리가 없는 꿈. (본래 꿈이란 기승전결을 무시하고 예측 불허로 마구 솟아났다가 대책 없이 사라지는 것). 아무튼 어느 날의 꿈속, 문득 생각해 보니 집에 계셔야 할 어머니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경악했다 ……! 어머니가 언제부터 집을 나갔는지, 돌아오지 않은 지는 얼마나 되는지 식구들 중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걸 모른 채 다들 아무 일 없다는 듯 수 십 년을 살아올 수 있었을까? 나는 죄책감과 회한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건 공포였다. 그러다가 아냐 이럴 수는 없어. 이건 꿈이야, 꿈이야, 몸부림치다 깨어났던 것이지만 이런 꿈은 서 너 번이나 반복 되었고 나중에는 그 실종자가 아버지로 바뀌어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어째서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


카프카의《실종자》는 그의《성(城)》처럼 미완으로 끝난다. 작가가 일찍 죽고 말았기 때문이긴 하지만 딴은 ‘실종’에 관한 이야기는 미완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실종. 종적을 알 수 없이 사라진다는 것.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끝이 날지도 모르는 우리네 삶은 미완의 실종을 닮았다.


가끔 생각한다. 광막한 우주. 나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가. 저 청춘의 별을 향해 가고는 있는 걸까? 길을 잃고 그저 헤매고만 있음에도 (어쩌면 실종된 상태임에도) 그런 줄조차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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