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천재의 소박한 꿈

-<카 프카의 골목길> 제7신

by 윤지형

카프카는 천재였을까? 불멸의 작가라 할 그를 평범한 인물로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천재 과학자, 천재 수학자처럼 천재 소설가라 부르는 건 아무래도 나는 어색하다. 고독의 천재라고 하면 모를까. (이른바 ‘고독의 삼부작’을 쓴 그다.) 그러나 고독의 천재라는 말도 마뜩지 않기로는 마찬가지다. 예수를 사랑의 천재라거나 부처를 깨달음의 천재 또는 도의 천재라 부르는 일이 바다를 찻잔에다 담으려는 시도만큼이나 허튼수작인 것처럼 말이다.

천재란 무엇인가? 명석한 두뇌, 고강도의 집중력, 마음먹은 것은 해내고야 마는 불굴의 에너지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노력해서가 아니라 그저 하늘이 내린 선물로서의 재능. 그래서 천재인 거고 나 같이 범인(凡人)으로 태어난 사람으로선 선망, 시기, 질투 나아가 경외를 아니할 수 없는 그런 선택받은 자인 것이다. 아무튼 천재는 그렇다 치자. 그럼 범인이란 무엇일까? 그저 천재의 변방에서 존재하는 별 볼 일 없는 존재일 따름일까? 그럴 리는 없다.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빛나 보여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할 흙, 돌, 공기, 물이나 쌀 없이는 우리는 생존조차 할 수 없다. 어둠 없는 빛이 없듯 범인 없는 천재도 없다. 그 진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생애를 담은 <아마데우스>는 천재와 범인의 경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가 빛나는 영화다. 무엇엔가 홀린 듯한 난봉꾼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의 대표주자 격인데 그 대척점엔 피나는 수련과 성실과 기도로 당대 최고의 음악가가 되어 궁정악장 자리에까지 오른 샬리에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모차르트라는 천재의 뒤에 숨은 미미한 범인, 천재 변방의 초라한 패배자다. 그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그가 스스로 세상의 모든 범인의 대변자가 되기로 결심하고는 불공정한/불공정해 보이는 신을 향해 울부짖으며 항의하는 모습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아프다. 그의 절규는 대강 이렇다.

‘신이여, 어찌하여 개망나니(처럼 보이는) 모차르트에게는 당신도 감동할 음악적 재능을 주시고 당신의 충실한 종으로서 오직 당신만을 찬양하고 경배해 온 내게는……!’


샬리에르의 절절하고도 정당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의 내 마음은 모차르트 편이었다. 같은 값이면 힘세고 가진 놈 곁에 서고 싶은 세속적 심리도 작용했을 지 모르겠다. 아니 그보다는 모차르트의 천재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름 요해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샬리에르로선 죽었다 깨어나도 갖지 못했을 순정하고도 발랄한, 우상파괴적 자유의 몸짓이었다. 비참한 몰락과 죽음도 어쩌지 못했던 그것. 신이 모차르트에게 부여한 선물은 음악적 재능 이전에 그 무엇도 파괴할 수 없는, 영혼의 자유라는, 도무지 재능이랄 수가 없는 재능 아니었을까? 이런 자유의 재능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고나는 것이라고 동서고금의 현자들은 말했다. 불가(佛家)에서는 모든 중생은 이미 부처이며 다만 그 부처를 알지 못할 뿐이라고도 했다.


요컨대 샬리에르는 자유의 모험보다 착실한 안정을 택했을 뿐으로 (여기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는 이미 받을 것은 다 받은 자인 것이다. (그러니까 신을 향해 징징 짤 이유가 없다.) 이건 천재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마땅히 받을 것을 다 받았다. 그의 짧은 생애가 극적으로 보여주었듯 그는 영혼의 자유로움과 함께 저주받은 운명의 담지자가 되었던 것이니까. 그런 운명에도 굴하지 않고 잘도 맞서기에 과연 천재라 하겠다. 어쨌거나 나는 한 번 묻고 싶다.


천재여, 그대에겐 행복도 천재적인 무엇이었던가? 아니 그대는 정녕 행복했던가?


카프카는 말한 적이 있다.


“평범한 것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구스타프 야누흐가 쓴 <카프카와의 대화>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에는 카프카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수공업을 예찬하는 장면도 있고 농사일이나 꽃 가꾸는 일을 해 봤다면서 다음처럼 말하는 대목도 나온다.


“농부나 수공업자가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꿈을 나는 꾸곤 합니다.”


그가 왜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긴 돈이나 명예를 추구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는 그였다. 그렇긴 해도 보통의 세인들은 함부로 넘나볼 수 없을 만큼 소설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서 예술로서의 문학을 유일한 구원의 창이라 여겼던 그였다. 도무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꿈은 소박한 농부나 수공업자가 되는 것이었다? 왜? 그건 고급 요리만 먹던 부자가 이젠 싫증이 나 보리밥이 그리워지는 것과 같은 일종의 기만 내지 변덕이었을까?


카프카의 <변신>은 ‘벌레’ 그레고르가 마침내 죽고 나자 남은 세 가족, 부모와 누이동생이 교외로 소풍을 나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세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 몇 달 동안이나 이런 일은 없었다.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전차 안에는 오붓하게 그들 세 사람뿐이었다. 따뜻한 햇볕이 차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 드디어 전차가 목적지에 닿았을 때 딸은 가장 먼저 일어나 싱싱한 육체를 쭉 폈다. 딸의 모습이 잠자 부부의 눈에는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을 다짐해 주는 확증처럼 보였다.’


정말 오랜만에 ‘벌레’(어쩌면 지독한 병마와 그로 인한 벗어날 길 없는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진 건강한 세 가족, 그들을 실은 전차 안으로 비쳐 드는 ‘따뜻한 햇볕’, 꽃봉오리처럼 젊은 누이의 ‘싱싱한 육체’…….


어쩌란 말인가. 생은 이토록 평범하기 그지없기에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그레고르의 꿈을, 농부가 되어 팔레스타인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고독한 천재 카프카의 평범한 꿈, 어쩌면 이루지 못했을 ‘기적’ 같은 꿈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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