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 내 눈에는 환히 보인다면 그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카프카의 소설을 읽을 때면 한 번씩 해 보게 되는 질문이다. 그의 ‘난해함’ 때문이다. 근데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난해함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초등학생이 배우는 구구단에 비해 아이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확실히 어렵다-고. 또한 소월의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보다는 이상(李箱)의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가 어렵다는 건 말할 나위가 없다-고.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는 어떨까?
다음 중 쉽다고 생각되는 것을 고르고 그 이유를 설명하시오.
(1)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다. (기독교 <신약성서>)
(2) 도(道)를 도라고 하면 더 이상 도가 아니다 [道可道非常道]. (노자 <도덕경>)
아무래도 (1)보다는 (2)가 어려운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1)은 정말 알아듣기 쉬운 말일까?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의 세계에서라면 말이다.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은 일만 광년의 거리보다 더 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마을에 나무꾼이 살았는데 그는 산에 나무 하러 갔다가 돌아오기만 하면 사람들에게 자기는 선녀를 봤노라고 떠들어댔다. 사람들이 재미 삼아 그 선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달라고 조를라치면 어찌나 빼어난 말솜씨로 선녀의 미모를 그려내던지 모두들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산에 나무를 잔뜩 해 마을로 내려온 나무꾼은 어쩐 일인지 선녀 얘기를 해달라는 사람들의 종용에 종내 말이 없었다. 그는 침울한 것도 같고 멍청해진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사람들은 시들해져 각기 집으로 돌아갔는데 친한 친구 하나가 끝까지 남아 그에게 은밀히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오늘은 선녀를 못 만난 건가?” 그러자 한숨을 푹 내쉬면서 나무꾼은 말하는 것이다.
“난 오늘 정말 선녀를 봤어 …… 내 말을 믿지는 못하겠지만…….”
나무꾼은 온몸으로 느낀다. 선녀를 못 본 사람에게 선녀에 대해 말한다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지상의 사람들이 천상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예전처럼 사람들의 혼을 빼 놓는 그럴듯하고 화려한 말로는 선녀의 진실에 한 치도 닿을 수 없음을 그는 이제 안다. 선녀의 사진을 찍어와 보여준들 마을 사람들이 확인한 선녀는 그가 본 선녀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하고 싶다. 선녀의 실제 모습을, 그녀의 실상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 말해 주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가 없다. 어쩔 것인가.
나무꾼이 한마디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입을 열게 되었다면 어떤 말이 나왔을까? 상상해 본다. 혹 이러진 않았을까?
‘그건 바람이었어. 흘러가는 구름이고 아름다운 죽음이었다네.’
뭇사람들이 정신 나간 놈의 헛소리라고 한들 그로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또한 상상해 본다. 난해-하다 할 그의 말은 그로선 최선의 말이 아니었을까?
‘네가 본 선녀의 진실을 말해 보라’는 마을 사람들의 요구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 나무꾼의 고충은 ‘난해함’의 길을 택하지 아니할 수 없었을 카프카의 고충을 닮았다. 그러기에 나는 나무꾼의 친구처럼 그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그걸 다중이 알아듣기 쉽게 말하기가 그리도 어려웠던 거요?’
내가 또 상상해 보는 카프카의 대답은 이렇다.
‘어렵다고? 참 이해하기 어렵군 그래. 나는 그냥 내가 본 것을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카프카 문학의 키워드 중에는 소통불가. 단절, 소외 같은 것이 있다. 과연 그의 <단식광대>는 이 문제를 거의 노골적으로 다루고 있다.
장장 ‘40일’까지의 단식을 시연(?)해 보이는 일로 먹고 사는 ‘단식 광대’. 사람들은 그의 ‘순교자’와도 같은 극한의 고행을 구경하며 찬탄도 하는 것이지만 그에겐 남모를, 말 못할 고뇌가 있었다. 단식 때문이 아니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단절감 때문이었다. 우선 사람들은 그가 ‘지금 하는 것보다 훨씬 오랜 동안 단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단식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라는 그의 말도 믿으려 들지 않았다. 단식 시연이 끝나고 나면 여인으로 하여금 초죽음이 된 그의 입에 죽을 조심스럽게 흘려 넣어주게 하는 흥행주도 그가 왜 음식물을 거부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단식 광대’의 비밀은 소설의 끝 대목에 가면 풀린다. 늙어 쓸모가 없게 된 광대는 죽어가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단식밖엔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입에 맞는 음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음식을 찾았다면 세상의 다른 사람들처럼 배부르게 먹었을 것이다…….’
자신의 단식의 진실을 끝내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던 단식 광대의 슬픔과 고뇌에서 나는 천상의 선녀를 보고야 만 나무꾼의 슬픔과 고뇌를 본다.
‘잘못된 이해의 세계와 맞서 싸우는 일은 불가능했다.’
<단식 광대>의 입을 빌려 카프카가 한 말이다. 이건 절규일까, 저항일까, 절망일망일까, 달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