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관주의, 빛나는 얼음 같은
푸른 소나무 같은

<카프카의 골목길> 제11 신

by 윤지형

앞으로 세상은 어찌 될까……?


며칠 전 우리 집 네 식구 저녁 밥상 위로 이런 물음이 올라왔다. 이상할 건 없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출구가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지만 이런 세상에 아이를 낳는다는 게 잘한 일이 될 진 정말 모르겠어.”


올해로 나이 서른 하나, 3년을 로마에서 일하다 지난 2월부터 귀국해 있는 첫째 딸의 말이었다. 나도 제 엄마도 뭔가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긴 했지만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으리라, 뭐 그런 거지. 이런 말은 나왔던 것 같은데, 그게 누구 입에서였는지……?


어쨌거나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이미 살만큼 산 내 처지와 앞으로 살아갈 날이 구만 리 장천인 두 딸의 처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거기에다 두 딸이 낳을 (낳기를 나와 아내가 은연중 바라는) 빛나는 아이들은? 그 ‘꿈속의 아이들’이 살아갈 지구라는 소행성의 몰골을 생각하니 새삼 아뜩해졌다. 얼마 전 몇 차례 우리를 강타한 태풍은 그냥 태풍이 아니라 기후변화의 불길한 결과라지 않은가.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꽁꽁 얼어붙어 있어야 할 빙하는 산더미로 녹아내리고, 지구의 허파라는 열대 우림 지대는 하루가 다르게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고, 생태계는 이미 회복불능의 지경으로 파괴되어 버렸고, 쓰레기 대란에 플라스틱 오션에 코로나 역병의 창궐까지……!


코로나 이전 시대(!)라 할 작년만 해도 나의 가장 큰 사회적-지구적 관심사는 핵발전소 문제였다. 꼭 우리 집이 고리 원자력 발전소(현재 5.6호기를 더 짓고 있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운대라서가 아니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이후 방사능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은 시나브로 잊어가고 있을 지라도, 내겐 코앞의 현실이 되곤 했다.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아니 우리나라 곳곳에 포진한 핵발전소들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로 이주할 계획도 세웠었다. 그러다가 어영부영, 10년 세월을 보냈다.


‘에이,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지경이 된다면 나만 살자고 도망을 치는 게 무슨 소용일까? 그건 옳은 일도 아니야. 함께 살던 사람들과 같이 죽는 편이 더 낮지. 그렇고말고.’


이런 생각도 해 가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의 코로나 19 사태는 미구에 닥칠지도 모르는, 상상 불허의 재앙으로서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공포를 어느 틈엔가 저만치 밀쳐 버렸다. 신통한 일이다. 하긴 아무리 견디기 힘든 고통이나 슬픔도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이나 슬픔이 닥치면 앞엣것은 절로 사라지는 게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 내일이라도 고리의 핵발전소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한다면 (오, 신이여, 제발 그것만은……!) 이제껏 코로나 바이러스로 겪어 온 나의 불편과 걱정과 고통은 일시에 날아가 버리게 되는 걸까? (나로선 아무리 변화무쌍하게 강력한 변종이라도 바이러스의 창궐보단 방사능의 공격이 천배 만 배 더 무서운데 …….!)


사람들은 코로나 19 사태가 우리 지구인들의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놓는다. 그런가 하면 백신이든 치료제든 인간의 능력으로 어떤 역병도 다 퇴치할 수 있다고 자신도 한다. (오, 나도 정녕 그러기를 바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가슴엔 비관주의라는 높고 푸른 소나무가 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벌거숭이로 이 불운한 시대의 혹한에 몸을 내맡긴 채 현실의 마차에 비현실의 말을 타고 나는 이리저리 내몰리고 있구나.’


카프카의 <시골의사>에서 이런 대목을 만날 때도 내 비관주의의 소나무는 하늘로도 뻗고 땅으로도 뻗어나간다.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처럼 혹한의 세계에 살고 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에스키모처럼 삶의 바탕도, 모피도, 또 다른 생존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아요. 그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모두 벌거벗은 몸이죠. 오늘날 가장 따뜻하게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뿐이에요. 그들은 아무 탈 없이 잘 지내요. 그들은 꼭 맞는 옷을 입죠. (.......) 우리는 모피를 사서 입거나 빌려 입지 맙시다. 차라리 안락한 얼음 사막을 간직해 둡시다.’

(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지식을만드는지식, 83쪽)


이렇듯 얼음처럼 빛나는 카프카의 비관주의는 나를 오히려 안심케 한다. 1912년 봄에 쓴 카프카의 일기 한 대목도 마찬가지다.

‘나는 보기에 따라서는 현명한 편이었다. 매 순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때 이른 죽음에 이르게 한 폐결핵 때문에 냉소적으로 한 말로만은 들리지 않는다. 그의 영혼은 삶의 궁극적 진실로 향해 있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이며 또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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