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는 수난을 겪지 않았다면 이 땅엔 뭐가 남았을까? 아무것도, 아니 폐허만 남지 않았을까?’
유럽, 또는 이탈리아, 또는 로마를 갈 때마다 여행의 결산 비슷하게 내 마음에 자리 잡곤 한 의문이다. 물론 폐허만 남았을 리는 없다. 헤브라이즘의 유산이 아니라도 저 빛나는 헬레니즘의 세계가 유장하게 펼쳐져 있지 않은가. 아름답고 발랄하고 신비한 그리스-로마 신화와 ‘금강산 일만 이천봉’처럼 우뚝한 철학자들……떠올리면 가슴 설렌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예수의 십자가 수난 사건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수많은 그림과 조각상들을 곰곰 생각한다. 로마의 대성당·교회·예배당뿐 아니라 박물관이나 미술관만 가면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그것들은 거부할 수 없는 침묵의 언어로 내게 속삭인다.
‘이 세상 진실의 근원에는 예수의 십자가가 있나니 그 수난을 기억하고 경배하라!’
서른셋 착한 아들의 차가운 시신을 무릎에 누이고 있는 어미의 마음, 그 ‘피에타’까지 갈 것까지도 없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기 전 죽음을 부르는 채찍질로 떨어져 나간 살점들, 서 있는 나무 십자가에 대못으로 박힌 두 손과 두 발, 창에 뚫린 허리, 머리에 씌워진 ‘가시면류관부터 생각하라는 것이다. 순결한 영혼이 감내해야 했던 그 극한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고개를 숙이라는 것이다. 아, 어찌 이를 거역할 수 있으랴. 나는 그예 복종한다.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라고 노래한 만해 선생의 마음을 내게서도 강렬하게 느낄 때가 있는 것을…...!
며칠 전 테르미니역 부근의 산타 마리아 대성당(Santa Maria Maggiore)에 들렀을 때도 그랬다. 동전을 넣으면 불이 켜지는 작은 촛대 하나를 성모상 앞에 바치고는 태어난 지 스무날이 되는 로마의 첫 손녀가 큰 탈 없이 잘 자라도록 해 달라고 아내와 함께 빌었었다. 따지자면 이 같은 행위는 불교든 기독교든 기복적 신앙에 대해 비판적인 내 이성에 반한다. 내가 적잖은 세월을 공부해온 붓다의 ‘염화시중(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임)’의 가르침과도 어긋날 뿐 아니라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초인’ 사상을 역설한 니체로부터도 비웃음을 살만한 것이다. (나는 ‘안티 크리스트’ 니체를 경애해 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머리가 하는 일이 아무리 반듯할지라도 가슴이 하는 일은 가슴이 하게 내버려 두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예수와 산타마리아에게 복종하는 나는 붓다가 들어 보인 꽃에도, 니체의 날 선 사자후에도 합장하고 절한다. 이게 비겁한 건지 바보가 될 작정인지 자못 안갯속일 때가 있긴 해도 말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도 구도의 길에서 지독한 고행을 무려 6년간 감행했었다. 말하자면 자발적 수난이었다. 우리나라 사찰의 대웅전 외벽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붓다의 생애도에는 눈이 퀭하고 뼈만 앙상하게 드러난 그의 참혹한 육신이 그려져 있다. 고행상(苦行像)이다. 그러나 그것은 왕자로 출생하여 결혼과 출가, 구도, 깨달음, 복음의 전파, 열반에 이르는 길고 긴 생애의 한 대목일 뿐이다. 고행 그 자체를 불가결한 덕목으로 여기거나 기억-경배-신앙화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싯다르타는 6년 고행 후 오히려 깨닫는다. 육신을 괴롭히는 것은 진리에 이르는 길에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고행이 선사하기도 하는 어떤 각성을 넘어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람들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방도를 궁구 했고 마침내 그에 대한 깨달음에 이르렀던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수난에의 경배'는 평생을 기독교와 투쟁했다 할 니체가 타기해 마지않은 것이기도 했다. 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철학자에게 고통-고난-수난과 연동되어있는 동정-연민-'피에타'야말로 기독교가 퍼트린 약자의 도덕, 노예의 윤리라는 것이다.
‘진작 죽어버린 신에게 울며불며 매달리지 말라. 자비를 구하지도, 망상에 불과한 사후 천국을 욕망하지도 말고 지금 이곳의 내 삶을 온몸으로 사랑하라.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다리 위에 서 있는 존재다……!’
말년의 저작 <안티 크리스트>에서는 십자가 수난 사건에 기반한 기독교에 비해 고통과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밝히 제시한 불교가 훨씬 건강한 종교라고도 그는 말했다. 이 놀라운 책에는 부록처럼 ‘기독교 탄압법’이란 것까지 실려 있는 것인데 그것은 사랑 혹은 연민의 종교로서 기독교에 대한 사형 선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수야말로 최초이자 최후의 참된 기독인이라 드높여 칭송했다. 니체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피를 토하듯 질타한 것은 신을 죽인 장본인이면서도 그걸 모르는 당대 기독인들의 수상쩍은 십자가 숭배였지 자신의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적 어떤 진실을 실현, 완결시킨 예수는 아니었으니까.
내 삶에 예수 혹은 기독교가 처음 등장한 것은 열일곱 살 무렵이었다. 어릴 때 교회도 가고 여름 성경학교도 나간 것이야 가난하고 심심도 했던 시절 과자도 얻어먹고 재미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그랬을 뿐이다. 고2 때 읽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제2의 성서’라고도 하는 이 위대한 소설이 전하는 예수의 존재는 정말 봄날의 햇살처럼 환하게 강렬했다. 예수의 현현이라 할 셋째 알렉세이 카라마조프! 그를 보면 영혼이 순수하다는 게 무엇인지가 손에 잡히는 것만 같았다. 예수, 그는 무구하기에 두려움이 없고 고난의 진흙 속에서도 말간 얼굴로 피어나는 연꽃과도 같은, 아름다운 영혼의 한 인간이었다. 그 무슨 거창한 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즈음 찾아 읽은 에르네스트 르낭의 <예수의 생애>에서도 내가 확인한 것은 그런 인간 예수의 진실이었다. 나사렛 시골 동네를 뛰어다니는 선한 성품에 친절하고 영민한 소년 예수, 갈릴리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모종의 이상주의자로서 깊은 명상에도 잠겼을, 한 번의 눈길과 말로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청년 예수가 거기에는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랬기에 고교생 때 잠시 나갔던 가톨릭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느냐’는 사제의 교리 문답에 ‘예’라고 대답할 수 없었고 끝내 나는 기독인은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는 늘 내 곁이나 앞에, 혹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학 초년생 때는 1970년 영국의 20대 청년들이 만든 <Jesus Christ, Superstar>에 열광도 했다. 혁명과 역사,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수난 그리고 ‘그 너머’의 진실에 대해 나 자신에게 물을 때면 그의 존재는 무한한 공감과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어머니 마리아, 그 ‘피에타’……!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기념품 가게에서 흰 돌로 만든 작은 모조품 ‘피에타상’을 사 온 날이었다. 사위 안드레아가 물었다. “한국에 가면 그걸 어디에 두실 건지요?” 내 서재에 둘 것이라고 답한 다음 나는 거기엔 청동으로 주조된 부처상 (반가사유상)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안드레아는 스스로 밝힌 대로 무신론자다. 큰딸과 둘이서 종교에 관한 논쟁을 하던 중에 니체의 <안티 크리스트>를 언급한 적도 있다. 딸 주희는 궁극의 진리란 게 있다면 불교든 기독교든 같을 것이라고 하고 안드레아는 신의 존재를 믿는 기독교와 그렇지 않은 불교의 교리가 어떻게 상통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영어 실력은 짧아도 내 눈치가 그랬다)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은 꽤나 뜨겁게 이어졌었다. 그러다 둘이 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으므로 내가 선언하듯 한 마디를 던졌다. “니체는 말했다. 진리의 가장 나쁜 적은 도그마(dogma)라고.” 그러자 활짝 웃으며 내 말을 반긴 것은 안드레아였다. “맞아요!” 사위가 내미는 두 손바닥을 나도 두 손바닥으로 받아서 손뼉 소리도 냈다. 그리고 둘은 아내와 내가 머무는 아파트를 나섰었다. 플라톤적 형이상학은 일단 끝. 니체적 삶 시작……이었다고나 할까?
전설 같은 이야기에 따르면 말년의 니체는 이탈리아 북부 도시 토리노에 갔다가 힘에 겨워 쓰러진 말이 마부로부터 마구 채찍질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달려가 말의 목을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아무 죄도 없이 고통당하는 말에게서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이라도 겹쳐진 것일까. ‘권력의지’의 화신으로서 위대한 ‘초인’도 가없는 ‘피에타’의 품 안에서는 한갓 울음 우는 어린아이가 되고 만 것일까?
늦은 오후에서 늦은 밤에 이르도록 홀로 <아베 마리아>를 반복해 틀어놓고 한없이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 싶은 날이 있다. 슈베르트, 구노, 바흐, 조수미, 안드레아 보첼리, 파바로티......숱한 번뇌로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날, 한없는 슬픔의 바다 그 밑바닥까지 잠겨있고만 싶은 날, 4.16 참사로 자식을 잃은 안산의 부모를 만나고 돌아온 날이며, 청년 시절 신군부의 도살자들에게 지독한 고문을 당했던, 선한 영혼의 육순 벗의 다가오는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날이며, 이젠 따뜻한 말 한마디 나눌 수 없는 저 세상의 아버지, 어머니 또한 내 두 살 아래의 동생이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그런 날 나는 붓다도, 니체도 아닌 예수를 그 십자가를, 산타 마리아를, 피에타를 찾는다..... 피에타의 진실과 함께할 줄 아는 내 마음의 벗들을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