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민학생’ 때부터 학교 화단이나 담벼락 가까이에 우뚝 서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보며 자란 세대다. 단군할아버지나 신사임당, 반공소년 이승복 동상도 있었지만 대왕님과 장군님 두 분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1981년 군을 제대하고 복학한 대학의 사범대 1층 현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청동 흉상이 모셔져 있었는데 한 열혈 학생이 그 머리를 도끼로 찍어버린 일로 온 나라가 들썩인 적이 있었다. 흉상의 당사자가 총을 맞고 죽어서 땅속에 묻힌 지가 2년이 가까웠는데도 말이다. 그 청년을 독립투사라 여긴 쪽이든 반국가적 테러분자로 몰아간 쪽이든 한 가지에는 마음이 같지 않았나 싶다. ‘동상은 청동도 돌도 아니다. 그것은 단단한 몸과 함께 분명한 정신도 지닌, 지금 여기 어엿하게 살아있는 존재다……!
그러기에 러시아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광장만 지키고 선 죽은 레닌의 동상을 끌어내려 때려 부쉈고 이 땅의 어떤 사람들은 어쨌든지 김구 선생을 깎아내리고 그 자리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동상을 앉히려고 안간힘을 다하기도 했을 것이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어찌해 보려는 사람은 아직 없어 다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우리의 시조로 옹립된 단군의 동상까지 특정 종교의 신자의 손에 훼손당한 일을 생각하면 동상이 대체 뭐길래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역사는 기억 투쟁의 역사다-라고 말해 본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E.H 카아의 명구도 달리 풀면 ‘역사는 현재가 벌이는 과거 기억을 향한 투쟁의 역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것에 대한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오래 기리고자 하는데 너는 이것을 부정하고 저것에 대해 그리하는구나, 할 때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때론 그 기억을 위해 투쟁도, 혹은 죽음도 불사하는가? 이번에 로마에 와서도 한 번씩 떠올려본 물음이다. 로마의 명소, 유적지, 건축물, 조각상, 미라 상, 회화들 속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외치는 것만 같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랬다. ‘나를 기억해 주오. 나를 잊지 말고 기억해 주오!’ 그리고 그 외침의 정점엔 십자가에 매달려 수난을 당하는 예수의 상이 있었다.
큰딸 부부, 아내, 작은 딸, 나 이렇게 다섯 식구가 함께 점심을 먹다가 무슨 얘기 끝에선지 모르지만 소설가 한강의 이름이 식탁에 오른 날이 있었다. 사위 안드레아가 한강의 소설을 읽었다는 것이다. 반가웠다. <채식주의자>? 내가 묻자 그는 아니라면서 책꽂이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왔다.
<Atti umani>
한강의 <소년이 온다> 이탈리아어 번역본이라 했다. <채식주의자>를 영역해 맨부커상을 공동 수상한 영국의 데보라 스미스가 <소년이 온다>도 번역하면서 그 제목을 'Human Acts'(인간의 행위? 행동?)로 바꾸었고 이탈리아 번역가는 그걸 그대로 자기 나라 말로 옮긴 것이었다. (한강이 <소년이…>로 이탈리아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말라르테 상'을 2017년에 수상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무서웠습니다”
안드레아의 독후감이었다. 어려웠다는 건 <소년이…>의 독특한 소설 기법과 관련 있으리란 건 짐작이 갔다. 중학교 3년생인 정대(주인공 격인 동호의 친구)가 게엄군의 총에 맞아 죽은 후 혼령의 눈으로 자신의 시신이 불태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독백하는 장면 등이 특히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그도 비슷하게 말했던 것 같다. 그가 특히 ‘무서웠던’ 것은 광주 시민들의 시신이 빽빽이 누워있는 상무대의 광경을 묘사한 대목에서였다. 자기 나라에도 무솔리니라는 군부 독재자가 있었고 군인들은 시민을 많이 학살했다는 말도 그는 덧붙였다. 그러니까 5월 광주의 ‘소년’은 로마에도 ‘온’ 것이었다……! (5.18의 기억을 로마에서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소년’은 언제 오는가? 우리가 그를 기억할 때다. 그의 꿈, 우정, 양심의 소리, 공포, 아픔 그리고 죽음에까지 이른 참혹한 수난을 잊지 않고 그 이름을 부를 때만 그는 우리에게 ‘온다’는 것이다. 소년이 ‘왔다’가 아니라 ‘온다’인 데는 까닭이 있었던 거다. (이건 <Atti umani>에 대해 사위와 다시 얘기할 기회가 생겼을 때 내가 소설의 원제목을 얘기해 주면서 하려 한 말이기도 하다.)
영국 번역가가 붙인 ‘Human Acts’란 제목도 내겐 예사롭지가 않았다. 일상에서는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행동’(act)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모종의 ‘시험’에 들 때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기독교의 주기도문이 종종 내 폐부를 찌르는 까닭이다.‘시험’이란 우리에게 모종의 행동, 결단을 요구한다.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다. ‘5월 광주’는 많은 이들에게 무서운 ‘시험’으로 다가왔고 심장이 뜨겁게 뛰는 인간인 한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외면하거나 피해 나갈 방도는 없는 것이었다. 행동해야 했다.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것도 행동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 그런 ‘시험’만큼 무서운 시험이 어디 있으랴……!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았다. 누구는 시린 눈을 감을 수가 없었고 누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누구는 살아서도 산 게 아니었으며 누구는…….
그날 나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서 몇 년 전 저장해둔 내 ‘독서 노트’ 파일을 열었다. 거기엔 <소년이 온다>가 있었다.
‘당신이 죽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그리고,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왜? 예수가 생각났고, 유럽의 숱한 위대한 예술가들이 예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현장을 왜 그토록 그리고 또 그리고 조각하고 또 조각했던가를 문득 깨달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기억 투쟁’의 최선의 방편이었다는 것, 예수 장례의 완성은 기억에 있고 기억의 진실에 있다는 것 아니었던가? 우리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지금 이곳에서 살아내고자 한다면 그들의 기억 투쟁을 기억하는데서 출발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 거지.’
<소년이…>에서 발췌해둔 문장의 하나는 이러했다. 정녕 그랬다. ‘부서지면서’…’영혼을’……! 바로 예수가 그랬고 이땅에서 명멸한 예수의 형제며 자매며 벗들이 그러했으며 고난에 처해서도 양심을, 영혼을 지키려 한 많은 착한 이들이 그러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나약한 망각의 존재인 우리가 기억투쟁을 함에 있어 맨앞에 있어 두어야 마땅한 기억의 보고가 아니겠는가. 그 보고 속 어떤 보석이 때론 날카롭게 부서진 조각으로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찌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