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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굥굥 Mar 02. 2024

나의 우울에 대하여

얼마 전에는 불현듯 죽고 싶었다.
따스한 햇볕을 손에 쥔 채였다.
가끔은 손목을 그으면 그것이 완전한 끝일까, 생각을 하곤 한다. 자살을 하면 지옥을 간다거나 하는 말 따위는 사실 알게 뭐람. 지옥도 결국 상대적일 텐데.
이런 생각은 사실 손목을 그었을 때 그 뒤처리가 귀찮다고 생각을 하며 완결이 난다.
" 보통, 죽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깊게 칼날을 찔러 넣어야 한다더라. "
라고 Y에게 말하자 그는 그래서 간편히 죽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을 택할 것이라며, 그리고 자신은 그 뒤처리를 부모님이 하는 것도 싫다고 했다.
나는 내가 사후에 기억을 갖게 되거나, 그것이 미련이 되는 것이 더 싫다고 대꾸하니, Y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고 말했다.
J와도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비슷하게 답했다.
나는 그들을 신기해하며, 또 그런 건 좀 너무 슬프지 않냐, 칭얼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그들과는 이런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무겁지 않아서 좋다.
내가 아플 때 아프다는 이야기를, 그저 아픔 그 자체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서. 그 이면의 사건이나, 상황이 중요하지 않아 진다.
나는 가끔 나를 이해하려고 할 때 구역질 난다.

요 며칠간은 내가 붕 뜬 느낌이었다.
어떤 기분이냐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안갯속에 있는 기분이라고 답했다. 아주 지독한 안갯속이라서, 내가 온 길도 내가 가야 할 길도 도통 보이지가 않았다.
병원에 가면 이런 질문 세례를 받게 되는데, 항상 표현이 모호한 나는 나를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설명해야 하는 그 상황이 종종 불편해지기도 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냥 모든 물음표로 끝나는 상황이 불편한 것 같다.
사람은, 내가 피하고 싶은 상황을 남에게 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상대를 부러 궁금해하지 않는 것도 같다.
하지만 사실 또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어 상대를 가만히 지켜보기도 하지만.

아무튼 나는 요즘 내가 낯설어 멀미가 날 지경이다.
차라리 우울한 것이 나은 것도 같다. 그것은 내가 어디까지 내려갈지, 어떤 바닥을 찍게 될지 대충은 가늠이 갔고, 나는 가늠이 가지 않는 돌발 상황들을 굉장히 싫어하니깐.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불현듯 아무 행동들을 마구 했다.
새로운 모임을 들어가고, 새로운 시작도 했고, 여전히 해는 지지 않았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운동도 하고 어수선한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더 어수선하게 굴고 있다.
사실 그 누군가를 만나는 행위가 나를 위로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의미를 남기지 않는다.

"엄마, 여전히 인생이 재미가 없어?"
엄마한테 묻자 엄마는 요즘 좀 나아졌다며, 나보고 요즘 그러냐며 또 걱정을 한가득 눈 안에 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는 무딘 데에 비해 나를 너무 사랑하고, 나는 너무 성격이 예민해서 고생이 많다.
스페인 여행을 할 때 아빠는 소리가 없으면 잠들기 어렵다고 말했다. 어쩌면 아빠도 무서운 것이 많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여전히 그런데, 역시 인생은 너무 길다.

나는 여전히 나를 모르겠다.
내 인생이 싫다거나, 내가 혐오스럽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예전에 비한다면 타인에 휘둘리는 것도 아주 조금은 줄었고, 타인의 시선에 전전긍긍하는 것도 조금은 덜해진 것 같다.
그보다 내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일까.
고요한 채 소란스럽다.
요즘은 채 울지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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