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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Sep 02. 2023

아빠, 제발 엄마랑 이혼 좀 해줘

한국에서 가족의 연 끊기

아빠가 엄마랑 이혼을 안 해준단다. 나도 오늘 엄마가 말해줘서 알았다. 엄마가 먼저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는데, 아빠가 그냥 무시해버렸다고 한다. 그래……. 하기 싫겠지……. 매주 반찬 가져다주는 착한 아내랑 누가 헤어지고 싶겠어? 그 마음이 이해는 간다. 하지만 딸된 입장으로서는 둘이 제발 좀 이혼했으면 좋겠다. 제발! 이제 모든 게 지긋지긋하다! 


두 사람이 이혼해야 하는 이유는 많고 많다. 우선, 엄마랑 아빠는 성향이 정반대다. 우리 엄마는 성실하고 우직하지만 눈치가 없어 답답한 구석이 있고, 대책 없이 착해서 남한테 다 퍼주는 타입이다. 반대로 아빠는 변화무쌍하며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만, 자기주장이 지나친 데다 이기적인 면이 있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엄마는 아빠에게 정말 많은 것을 해다 바쳤다. 돈도 엄마가 벌었고, 집안일도 엄마가 했고, 나도 엄마가 키웠다. 엄마는 외조부모님께 돈을 빌려서 아빠의 도박빚을 갚고, 그러다 우울증에 영양실조도 걸렸고, 지금은 따로 사는 데도 매주 반찬을 해다 준다.


내가 보기에 엄마는 공동의존 증세를 겪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이 개념을 알게 된 것은 <도박중독자의 가족>이라는 웹툰이었다. 이 만화는 내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하나하나 읊을 수는 없겠지만, 거기 나오는 중독자의 가족이 딱 우리 엄마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도박중독자만 문제인 것이 아니라 도박중독자 가족의 태도도 문제였다니! 한편으로 이걸 조금 일찍 알았다면 달라지는 게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빠랑 같이 살 때 아빠를 억지로 데리고 도박중독센터에라도 갔다면……. 셋이서 가족 상담이라도 한 번 받았다면……. (하지만 난 그때 아빠를 몹시 무서워했기 때문에 그런 대담한 행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단순히 객관적인 이유를 찾는 눈이었으나, 주관적 심정 역시도 엄마와 아빠가 이혼했으면 하고 바란다. 부끄럽지만, 한때 나는 엄마가 아빠를 버리지 않는 것을 보고 답답한 마음이 들면서도 내심 '엄마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을 버리지 않는구나. 그럼 나도 엄마한테 버려질 일은 없겠구나.'하고 안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엄마 개인의 인생을 위해서도 아빠를 버렸으면 좋겠다. 엄마는 이제 아빠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불행해졌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아빠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 만일 내가 엄마 인생에 그 정도의 해를 입혔어도(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지만) 엄마는 나를 버려야 마땅하다.


다행인 점은 엄마가 아빠한테 이혼하자는 말을 꺼낸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일도 안 일어날 줄 알았다. 나는 많은 세월 동안 내가 엄마 아빠 사이에 낀 이물질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엄마가 아빠를 버리겠다는 마음조차 먹지 못할 줄 알았다. 엄마는 아빠를 원망하는 것에 중독됐고, 아빠가 불쌍하다는 핑계로 평생 곁에 남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엄마를 너무 무른 사람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반성한다. 엄마는 아직도 성장하는 사람인 것 같다. 아직 이혼 소송까지 할 마음은 없어 보이지만……. (그게 불가능하기도 하고.)


그래도 혹시 몰라서 종일 인터넷에 '합의 이혼', '이혼 거절' 따위를 검색하고 있다 보니 인생에 회의감이 든다. 이혼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 적고, 이혼을 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치명적이다. 아무리 봐도 당장 이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변호사 선임 비용이 없을뿐더러 '이혼 귀책사유의 증거'가 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아빠가 경마 중독인 거? 아빠가 외조부모님한테 돈 빌리고 안 갚은 거? 아빠가 10년째 우리랑 따로 살고 있는 거? 아빠가 10년째 꾸준히 일한 적 없는 거? 아빠가 우리 기초생활수급자 지원금까지 받고 사는 거? 이거 다 가능한 건가? 


아빠가 엄마랑 이혼한다고 해도, 아빠는 계속해서 내 아빠인 사실도 심란하다. 나는 영원히 아빠 성으로 살다 죽을 거고(가장 숨 막히는 부분) 내가 결혼을 하면 아빠랑 버진 로드를 같이 걸을 거고(결혼 안 할 거다), 아빠가 죽으면 내가 상주를 설 거다(이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한국에서 부모 자식의 연을 끊는 건 이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난 이제 아빠를 아빠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지경까지 온 계기를 딱 하나만 꼽긴 뭐 하지만, 그래도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4월일 때였다. 아빠는 그 이전부터 한 번 화를 낼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부쉈지만, 그즈음에는 유달리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함부로 말도 걸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아빠가 퇴근할 때쯤에는 일부러 자는 척을 했다. 그러다가 아빠와 엄마가 대화하는 소리를 듣게 됐다. 아빠는 요즘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성질을 내다가, 자신은 이제 잃을 것이 없다면서, 딸인 나를 고아원에 버리겠다는 말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빠는 그때 일을 기억도 못할 것 같은데, 어린 나한테는 날 '버리겠다'는 말이 정말 큰 충격이었다. (1년 후에 아빠는 정말로 날 버렸는데, 그때는 또 이만큼이나 슬프지 않았던 것 같기도……. 그때 당시에는 버려진 줄 몰라서 그랬나…….) 아무튼 그때는 필사적으로 '내가 잘못 들었겠지, 아닐 거야, 얼른 자자'하고 억지로 엉엉 울면서 잠들었는데, 며칠 뒤에 아빠가 날 앉혀놓고 직접 그 이야기를 또 하더라. 면전에서 버리겠다고 하니까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정말 가슴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때 학교에서도 참 힘든 일이 많았는데, 그거랑 비교도 안 되게 집에서 더 힘들었다. 학교에서 공황증세 와서 보건실 가고 그랬다. 오죽하면 내가 다른 사건이랑 달리 시기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나. 아빠가 같이 죽자고 했을 때보다도 아빠가 나를 버린다고 했을 때가 더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 짧은 인생에서 15살 4월이 제일 힘들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여전히 내 아빠이고 싶나 보다. 능력 없는 가장이라 차마 날 책임질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는 것은 싫나 보다. 아빠의 가장 최근 연락은 작년 12월인데, 내 생일에 나더러 당신 인생의 가장 큰 보물이라며 생일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누가 보물한테 연락을 일 년에 한 번 하냐고……. 말을 말자…….


아빠에 대한 내 감정은 너무도 복잡해서 글 하나에 다 담기 어렵다. 대신 서동주 님이 부친 서세원을 회고하며 쓴 글에 크게 공감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 인용해 두겠다. 시간이 있는 분은 꼭 전문을 읽어보셨으면 좋겠다.

나는 아빠와 닮은 점이 참 많았다. (이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나는 적어도 그 순간들만큼은 아빠를 참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고, 나와 아빠의 사이가 틀어지고, 동생과 부모님과의 관계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가족이란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긍정적인 감정들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렇게 좋아하던 추리 소설도 더 이상 읽기 싫었다. 영화를 보는 일도 싫어졌다. 더 이상 아빠와 같은 취미를 갖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취미를 통해 아빠가 생각나는 것은 더욱 싫었다.

어차피 아빠에겐 이미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새로운 자식도 생겨 나와 동생은 신경 쓰지도 않을 테니 나도 그러고 싶었다. 신경 쓰기 싫었다. 그렇지만 같은 유전자 탓인지 뭔지, 나는 취미 이외에도 아빠와 닮은 점이 많고, 그래서 지금도 가끔은, 아니 자주, 아빠 생각을 하게 된다.


아빠랑 나는 많이 닮았고, 아빠가 내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자주 아빠와 사이가 좋아지는 상상을 한다. 아빠가 나를 버리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혹은 아빠가 나와 꾸준히 연락했으면 어땠을까, 아니면 엄마가 아니라 아빠랑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제 너무 늦었다. 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맹세코 아빠가 불행한 걸 원하는 게 아니다. 한때 아빠를 미워하고 원망했었지만, 이제는 그러기엔 너무 지친다. 그저 아빠가 우리 없는 곳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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