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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Jul 31. 2023

할머니께서 졸업선물로 50만 원을 주셨다

변화와 굴곡

다음 달에 코스모스 졸업을 한다. 말이 다음 달이지, 할 일은 진작 다 끝났다. 졸업 논문도 냈고 졸업 조건도 다 채웠다. 며칠 전 할머니께서는 내게 50만 원을 주시며 이 돈으로 취직할 때 정장 한 벌 해 입으라고 하셨다. 내가 빨리 취직하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이 돈을 보고 있자니 밀려오는 생각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복잡 미묘한 심경을 정리하고 싶어서 브런치를 켰다. 글이 다소 두서없더라도 이해해 주길 바란다. 


우선 50만 원을 받았으니 당연히 기뻤다. 태어나서 할머니께 그런 큰돈은 처음 받아봤다. 우리 집은 가난하기 때문에 평소에 이런 돈 만지기가 쉽지 않다. 할머니께서도 한 달에 십 몇만 원씩 동사무소에서 어르신 아르바이트를 하시는 것이 유일한 수입원일 텐데, 나를 위해서 50만 원이나 모으신 게 사뭇 감동적이다. 감동적인가? 


배은망덕하게도 마냥 감동을 받을 수 없다. 이 50만 원이 내게는 '어서 취업해서 이 집에서 나가라'는 뜻으로 들린다. 할머니께선 이제 직접적으로 나가라는 말씀은 안 하시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종종 '네가 얼른 돈을 벌어서 네 엄마를 모시고 나가야지'라는 말씀으로 눈치를 주신다. 나는 16살 때 엄마와 함께 외조부모님 댁에 얹혀살게 된 이후로 이곳이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10년이 지났는데 말이다. 이 정도 지났으면 서로 가족이라고 생각을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마음을 붙이려다가도 여전히 객식구 취급을 받기 일쑤다.


이럴 때면 내가 조금 더 살가운 성격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된다. 나부터가 '객식구'적인 태도에서 벗어난다면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그게 쉽지 않다.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거실을 가로질러 화장실에 가는 것도 불편해서 물도 최대한 안 마셨다. (그러다 요로결석에 걸려서 응급실도 갔다.) 집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도 잘 모르고, 사소하게는 베란다에 들어갈 때 신발을 신어야 하는지 벗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집에 오는 모든 손님들은 내가 그들의 방문을 예고받지 못한 상태에서 온다. 명절이 되면 집에 친척들이 오기 때문에 홀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카페에서 버틴다. 


변명을 하자면, 시작이 나빴다. 16살의 나는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세 식구가 함께하는 정상가족의 삶에서 벗어나면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다. 아빠는 화를 낼 때 종종 '너 자꾸 이런 식으로 굴면 나는 널 버리고 도망갈 거다, 너는 외할아버지 댁에 가서 살게 될 거다, 넌 거기 가면 좋겠네'하는 말로 협박을 하고는 했는데 그러면 나는 엉엉 울면서 외할아버지 댁에서 사는 거 싫다고, 잘못했다고 말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외조부모님 댁에 가는 길이 처음으로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살게 되는' 것이었을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두운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면서 내 인생이 나락으로 꽂히는 것 같았다. 


그때는 나를 대하는 외조부모님의 태도도 무서웠다. 외조부모님 댁에 얹혀살기 1년 전, 엄마가 우울증과 함께 가벼운 영양실조가 와서 몇 주간 일을 쉬었던 적이 있었다. 엄마는 며칠을 외조부모님 댁에서 요양했는데, 그때 나도 덩달아 외조부모님 댁에서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자리를 비울 동안 외조부모님께 '너는 엄마가 저렇게 될 동안 뭘 하고 있었냐'는 식의 꾸지람을 몇 번 들었다. 그게 당시에는 큰 상처였다. 나는 외조부모님께서 내 상처도 위로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도 너희 아빠 때문에 힘들지, 엄마가 아파서 슬프겠구나, 편히 쉬다가렴,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때 처음으로 외조부모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엄마를 사랑하는구나 깨달았다. (당연한 건데 왜 어릴 땐 몰랐는지⋯. 날 마냥 예뻐해 주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외조부모님이랑은 대화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내 방에만 콕 틀어박혀서 집안일과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게 됐다. 내가 대학 기숙사에 지내게 되면서부터는(내 인생 최고의 선택 중 하나) 많이 호전되었으나, 그래도 예전의 잔재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외조부모님께서는 언제나 내가 아니라 엄마가 1순위인데, 그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아직까지 가끔 서운한가 보다. 나도 외조부모님보다 엄마가 1순위인데 서운해하는 것도 웃기다⋯⋯. 나도 정말로 유치하게 이러고 싶지 않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까 집을 나가야 할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솔직히 나갈 엄두가 안 난다. 구구절절 써놓긴 했지만, 좀 눈치 받는 것만 빼면 지금의 삶에 만족하기도 한다. 이게 좋은 말로는 적응이고(이제야 적응을 한 것도 웃겨) 나쁜 말로는 패배주의인 것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 머릿속이 난리가 난다.


<자아들의 대화>
A자아 - 절대 취직하고 싶어 하지 않음. 
B자아 - 일단 아무렇게나 취직은 하라고 함.

A: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만 취직을 하고 싶지 않다. 
B: 취직 안 하면 뭐 먹고 살 건데?
A: 하⋯⋯. 근데 좀 나중에 생각하면 안 돼? 아직 졸업식도 안 지났는데? 쉬고 싶다⋯⋯.
B: 너 26살이잖아⋯⋯. 남들은 이때 다 자리 잡아.
A: 그렇지만 난 쉰 적이 없잖아ㅠ 나 직전 방학에도 2달 내내 인턴 했잖아⋯⋯.
B: 인턴 했던 곳에 연락 좀 해봐. 졸업하고 같이 일하자고 했잖아.
A: 나 거기 다니면서 3kg 빠졌어. 못 돌아가겠어! 돌아가면 병 걸린다!
B: 그럼 어떻게 할 건데?
A: 좀 궁해지면 웹툰 어시스턴트를 하거나, 웹소설을 쓰거나, 그거 둘 다 하면 먹고살 수는 있을 것 같아.
B: 그걸로 평생 먹고살게? 가능?
A: 그건 모르겠음
B:??
A: ⋯⋯.
<자아들의 대화 2편>
B자아 - 일단 아무렇게나 취직은 하라고 함.
C자아 - 취직하면서 전공도 살리라고 함.

B: 실현 가능성이 얼마나 됨?
C: 모르겠음 나 학점도 개판이야
B: 이걸 진짜로 하고 싶긴 함? 이거면 주 5일 9 to6할 수 있겠니?
C: 주 4일이고 9 to4면 할 수 있을 것 같음
B: 되겠니
C: 그러게 XX⋯⋯.
<자아들의 대화 3편>
B자아 - 일단 아무렇게나 취직은 하라고 함.
D자아 - 그냥 모르겠고 해외여행 가고 싶음 

D: 해외여행 가고 싶어. 태어나서 외국을 한 번도 못 가봤어. 여권은 20살에 만들었는데 10년 만기야. 이대로 취직하면 만료될 때까지 해외 못 가.
B: 돈은?
D: 있긴 있음
B: 쓸 거야? 진짜?
D: 그러게 내가 간이 작아서 못 쓰겠다 하하하 미친


아 적고 보니까 진짜 답이 없네⋯⋯.

일단 그림 그리고 글 쓰면서 11월에 있을 준학예사 시험을 준비하는 거 어떰?

어차피 전공해서 굳이 자격증 없어도 되겠지만 그래도 있으면 어디에 쓸 일이 있지 않을까⋯⋯.

아악⋯⋯. 아 인생 어떡하지? 취업 포기가 남일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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