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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Feb 25. 2022

3년간 매일 일기 쓴 후기

그리고 매일 일기 쓰는 팁

지금까지 써 온 일기장들.


자살하고 싶다...

- 2017년 6월 21일
안네의 일기를 읽고 사춘기 소녀의 시점에서 유대인의 고통을 체감하고 전쟁과 차별이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내 일기를 읽고는 불행 포르노 자기 연민 만성우울증녀의 비관적 삶에 염증을 느끼며 아 XX 난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이런 걸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 2018년 8월 13일
일기를 처음 썼을 때보다 지금이 더 나은 삶이 되었기 때문에 나를 한 번 더 믿어보려 한다. 내가 생각해놓은 나의 한계에 날 가두지 말자.

- 2020년 10월 5일


일기가 많다 보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발췌해야 하는지 감이 잘 안 온다. 이거 쓰자고 처음부터 다시 읽기도 뭐한 분량이다. 하는 수 없이 눈에 띄는 부분만 찾아서 넣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지나치게 드라마틱한 변화로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로는 달팽이 기는 것처럼 조금씩 변했는데 말이다.


이 글이 반지하 매거진에 있는 까닭부터 설명한다. 내 인생이 암울해졌던 가장 큰 이유가 반지하 입성이고 내 인생이 호전되었던 가장 큰 이유가 일기 쓰는 습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기만으로 나아진 것은 아니다. 난 18년도에는 정신과 통원 진료도 받았고 19년도에는 학기 중에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때 반지하에서 잠시 나오면서 20년도서부터는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반지하에서도 '살만 한데?'라고 느끼기 시작한 까닭은 확실히 일기 덕분이다. 인생이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전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내 인생에 있어 중대한 사건이다.


하여튼 내가 이렇게 일기 광신도가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일기가 나한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소개하며 이번 기회에 일기를 영업해보고자 한다.


1. 우울한 감정이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내가 아날로그로 일기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기를 쓴다고 갑자기 우울한 감정이 싹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당장 내 일기만 봐도 우울하고 화나는 내용이 아예 없진 않다. 그런데 일기를 쓰면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을 조절하는 데에 유용하다. 화나는 일이 있었다고 치자. 일기를 펼쳐서 욕을 한 바가지 쓴다. 그럼 그 내용을 세 장 넘게 쓰면서 쓰레기를 생산하고 있다 보면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 수 있다. 와 내가 뭐 하는 거지? 이게 세 장이나 허비해서 화낼 일인가? 나 한가한가? 이 생각이 든다. 쓰다 보면 생각이 딴 길로 새기도 하고, 감정이 소비돼서 화가 풀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손이 아파서 계속 못 쓰겠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화가 풀린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 난 지금도 화나는 일이 있으면 일기장부터 펼친다.  


이 방법의 장점은 다음번에 화가 났을 때도 유용하다는 점이다. 저번에 화냈던 내용을 보면 대체로 화났을 때 당시보다는 침착하게 사건을 볼 수 있게 된다. (화가 싹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럼 이 감정 소모가 얼마나 나에게 쓸모없는 일인지 돌아볼 수 있다. 이게 진짜 화낼 일인가? 고작 이걸로 우울해야 할 일인가? 그냥 이 시간에 재밌는 거 하는 것이 낫지 않나? 그런 생각에 닿는 것이다.

내가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에는 이런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네가 느끼는 감정은 진짜가 아니야. 하늘은 파랗잖아. 하지만 구름이 끼면 하늘이 회색이라고 생각하지. 실제로는 계속 파란색인데도 말이야. 달라진 건 없어. 그냥 회색 구름이 지나가는 것뿐이야.



2. 뭐라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중요) 

번아웃이나 우울증을 겪는 사람에게 의사가 늘 말해주는 게, 얼마나 하찮은 것이든 '성취'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대개는 베이킹, 청소, 샤워 등의 취미를 추천해준다. 내게 있어서는 청소나 샤워보다는 주변에 있는 공책을 끌어다가 아무거나 적는 것이 에너지를 덜 소모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진짜 아무 말이나 적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정말로 SNS처럼 썼다. (그렇다고 SNS를 안 하는 것도 아니다. 둘 다 쓰는 거다.) 'ㅋㅋㅋXX 망했다 배고프다^^;;' 이런 걸 그대로 일기에 적었다. 그런데 적다 보니까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됐다. 2020년 9월 14일에는 욕을 끊었고, 2021년 6월 8일에 이모티콘 및 초성체를 끊었다. 2021년 12월 4일부터는 줄글로 꽉 채워 쓰던 일기를 문단으로 끊어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전인 2022년 1월 16일부터는 글씨 교정을 시작해서 정자체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이런 걸로 성취감을 느껴도 되나 싶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가면 갈수록 그럴듯한 것을 내놓을 수 있다는 소리다. 작은 것들에서 시작해서 더 큰 것들을 해낼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일기를 통해 배우게 됐다. 손 닿는 주변에 종이와 펜만 있다면 해낼 수 있는 작은 성취를 통해 여기까지 이룩했다는 것이 마법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사실 이것 말고도 일기로 얻은 것은 정말 많다. 나는 내 취향을 찾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글 솜씨가 좋아졌고, 욕도 끊었고……. 과장 좀 보태서 2000가지는 쓸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다 적기엔 마냥 일기 덕분도 아니기도 하고, 이 글에서 궁금증이 일 만한 부분도 아닌 듯해서 다음을 기약해본다. 반지하 살던 내 삶이 나아진 계기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언급할 예정이다.


그럼 이제 오래 쓰는 팁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내가 매일 일기 쓰는 것을 아는 주변인들은 자주 그 비법을 묻고는 한다. 당연하지만 비법이라고까지 말할 만한 것은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한 잔 마시거나 세수를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그냥 습관이 되어서 그런 것이다. (일기를 통해 얻게 된 것에 '좋은 습관을 들일 수 있다'를 추가하고 싶어 졌다.) 그러니 세간에 널린 습관 만드는 법이랑 크게 다를 법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경험한 것을 위주로 적어 본다.


1. 하루 밀린 것 개의치 않기

이제 와서 밝힌다. 제목에 '매일' 일기 썼다고 버젓이 자랑했지만, 사실 몇 번은 밀린 적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다 쓰긴 썼다.


일기를 매일 쓰겠다고 마음먹고선 처음으로 마련했던 일기장은 칸이 좁은 데일리 다이어리였다. 2020년의 모든 날이 미리 적혀 있었고 내 목표는 하루 할당된 칸을 모두 채우는 것이었다. 하루라도 밀리면 날짜 아래에 있는 빈칸이 신경 쓰이다 보니 큰 글씨로나마 억지로 채웠다. 칸이 작다 보니 하루를 밀려도 큰 부담이 아니었던 덕택에 모든 칸을 채워갈 수 있었다. 채우고 나니까 뿌듯했다.


게다가 쓰다 보니까 글쓰기에 익숙해져서, 어느 새부터는 글씨를 작게 써도 칸이 모자라 별책을 따로 마련해야 했다. 그게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일기를 두 권씩 쓴다.(하나는 매일 한 페이지씩 채우는 용도, 하나는 그걸 다 채우고도 할 말이 남을 때 쓰는 용도.) 작년쯤서부터는 일기를 밀리는 걱정을 아예 하지 않는다. 밀리더라도 다시 채우면 되지, 하고 가볍게 생각한다. 어차피 평생에 걸쳐 쓸 일기라고 생각하고 있다.


2. 쓸 내용 없어도 아무거나 쓰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는 초기에 SNS에서, 혹은 단톡방에서 하던 소리를 그대로 일기에 썼다. 배고프다, 졸리다, 오늘 저녁 반찬 뭐였다, 오늘 인터넷에서 이런 글 봤는데 웃겼다, 이런 쓸데없는 것들을 적었다. 할 얘기가 없으면 필사라도 했다. 당장에 삶의 깊은 사유를 통해 멋진 칼럼을 써내는 건 천재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그건 지금도 못한다.


일기를 쓰다 보면 매일 일상이 반복된다는 생각도 들고, 썼던 내용을 또 반복해서 쓰고 있다는 회의도 든다. 그럴 때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많은 자기 계발서를 하나 집어서 거기에 대답하거나, 인터넷에서 <100문 100답>이라고 검색하거나, 버킷 리스트라도 적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렇게 적다 보면 가끔씩 쓸 만한 문장이 나오기도 한다. 진짜 가끔이지만 말이다. 어느 순간서부터는 일기를 쓰는 행위 자체를 즐기게 된다.


말이 길어졌다. 비록 일기를 쓴다고 하루아침에 인생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변한다. 일기 영업 글이면서 웃기는 소리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행위가 아무 쓸모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내 인생을 바꾼 건 일기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기가 아닐 수도 있다. 일기 쓰는 것은 당장의 변화보다는 내 인생의 방향을 살짝 바꾸는 것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틀어진 내 인생을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편안한 수단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권한다. 오늘은 짧은 글이라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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