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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Feb 24. 2022

8년간 반지하 살다가 탈출한 후기

여기에도 사람이 삽니다


반지하에 살 때 낙서했던 그림들.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좀 그릴 걸 그랬다.


반지하는 사람 살 곳이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사람들이 산다. 아마 이 글은 그 모순점을 끊임없이 끄집어내게 될 것이다. 이건 어쩌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체제 그거 바꾸면 어디가 덧나냐 하고 징징대는 글일 수도 있으니 주의했으면 한다.


가난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겪은 것들 일들 중에 글로 써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건 가정폭력이나 대학 자퇴, 정신과 내원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뿌리 깊이 원망하면서도 체득했던 것이 바로 가난이었다. 한 마디로 내가 제일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주제였다.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자본주의 해체를 주창하는 글이 아니라, 지극히 미시적인, 나라는 개인이 겪은 가난에 대한 글 말이다. 그걸 통해서 가난한 누군가가 위로를 받거나 가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가난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기쁠 것 같다. 주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여기에서 미리 나보다 똑똑하신 분의 글을 인용한다. 한겨레의 <'기생수'와 대면하기> 칼럼의 일부다.


스페인의 정치철학자 아델라 코르티나는 난민과 이주자에 대한 적대의 바탕에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이 있다며 이를 ‘가난포비아’라 명명했다. 비자발적 빈곤은 한 개인의 정체성도, 선택의 문제도 아니란 점에서, 그는 ‘가난포비아’가 다른 유형의 증오나 거부와는 다른 독특함이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나는 “비장애”, “이성애”라는 명명에 점차 익숙해졌는데, 이는 장애, 동성애를 ‘정상’이 아닌 것으로 바라보는 관행을 문제 삼은 교육의 효과이다. 하지만 같은 맥락에서 나는 “비-빈곤” 같은 표현을 떠올린 적도, 그런 교육을 받아본 일도 없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경제 성장과 발전은 성취이고, 그 이념은 공기처럼 당연해서일까? 부자 되라는 기원은 건강 못지않게 두루 오가는 새해 덕담이다. 결핍은 그저 불운이고 수치일 따름이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나는 가난합니다', '가난 법제화'라는 팻말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체제에 의해 공식적인 차별을 받고 있다. 이것은 국가가 묵인한 차별이자 가장 만연한 차별이기도 하다. 가난은 필연적으로 숨겨야 이득이고 드러내면 혐오의 시선을 받는다. 


나 역시 당당하게 이야기하지만 어느 정도는 가난 차별에 일조하는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10년 넘게 친구들을 집으로 부른 적이 없다.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친구들 앞에서 내내 아버지와 함께 사는 척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주말에 아빠랑 함께했던 에피소드 몇 개를 쥐어 짜내서(아빠와 함께 살던 초, 중학생 때 일을 기반해서 창작했다) 친구들한테 흘리는 식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내가 아직도 아빠랑 같이 안 사는 줄 모른다. 반지하에 살았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진짜 이를 악물고 죽어라 숨겼다. 지금도 내 가난이 창피하다. 솔직히는 아직도 벗어나고 싶은 데다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끊임없이 하고 있다(이건 안 하면 게으른 사람 취급받잖아). 


그런 주제에 왜 이런 글을 쓰냐 하면 이 또한 날 위해서다. 난 사춘기의 가난한 여자애들이 가난을 자신의 탓으로 지우면서 죄책감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발 '우리 엄마 인생은 나 때문에 망했다'는 생각 좀 안 했으면 좋겠다. '나 하나만 입을 덜면 우리 집이 이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을 텐데'하는 생각은 접어다가 소각장에서 태우고 싶다. 당연히 나도 다 해봤는데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데다 우울해지기만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나는 우울증에도 걸렸었다. 


그리고 가난하지 않은 사람들한테도 말하고 싶다. '눈치 좀 챙겨달라'라고 말이다. 어린 시절에 친구들에게 들었던 '너희 집은 몇 평 살아?' 하는 질문부터 '너는 가 본 나라가 어디야?' 하는 질문 등 꼽자면 아주 셀 수 없이 많다. 그걸 앞으로 글에다가 아주 찬찬히 적어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이 내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에 대해 알게 되면(문보영 시인은 저서 <일기 시대>에서 '일기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선한 면을 가지고 있어서 누군가의 일기를 읽으면 그 사람을 완전히 미워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라고 적은 바 있다.), '가난한 사람도 사람이구나!' 정도는 알 수 있지 않나 싶은 것이다. 


여기까지가 글의 목적이었다. 그럼 글의 제목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적어본다. 가난을 대표하는 것은 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거의 서울에만 있다는 '반지하'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주 잘 나타내 준다. 서울의 100가구 중 무려 6가구가 반지하게 산다는데 이상하게 주변을 둘러보면 반지하 산다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가시화되지 않은 거다. 나만 해도 내가 반지하 살았던 거 아는 사람들은 이 글 읽는 사람들밖에 없을 거다. 특히 서울이 그렇다. 주위에 잘 사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초고층 아파트 사는 친구 집 한 번 갔다 오면 걔 앞에서 '나는 사실 반지하에 살아'하고 반봉박두(?)를 할 수 없어진다. 아니, 그야 당연히 내가 유달리 소심한 걸 수도 있겠지. 그런데 막상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돼?'냐는 부잣집 친구의 말을 들으면 뒷목부터 뻣뻣해진다. 그 뒤로 '나는 조부모님과 함께 살아서 우리 집에 너희가 올 수는 없겠다 미안해'하는 말을 달고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적는 반지하는 비교군이 가까이에 있는 상황에서 가난한 이의 사고가 얼마나 망가지기 쉬운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여기까지 읽고도 감이 안 온다면 예시만 짚고 넘어간다. 반지하 살기 전에 내 꿈은 "전원주택에 살기"였다. 평범한 꿈이다. 그런데 반지하에 살면서부터 시야가 점점 더 좁아졌다. 

'와 나도 아파트 살고 싶다'

'뭘 거기까지 바라냐 집에 물만 안 새면 돼'

'아냐 집에 침대만 있으면 돼'

'집에 세면대만! 진짜 세면대만 있으면 좋겠다 제발 허리 끊어질 것 같다'

이런 사고가 반복되니까 생각의 폭이 좁아진다. 이것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 가짐은 사람의 시야를 좁게 하고 하루 종일 조바심이 나게 만든다. 집이 가난해지면 마음도 가난해지는 거다. 나는 반지하 살기 이전부터 가난했고 지금도 반지하 살 때랑 비슷하게 가난한데 반지하 살 때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뛰는 줄 알았다. 이건 반지하가 아니어도 겪는 일일 수도 있겠다만 일단 나는 반지하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물론 깨닫고 난 이후로는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이 글은 마냥 우울한 글이기보다는 극복에 방점을 둘 것이다. 제목부터가 '반지하 탈출한 후기'면 변화된 점을 보여야 할 것 아닌가. 우선은 이렇게 된 계기를 찬찬히 짚어보고 내 사고가 어떤 식으로 변형되었고 확장되었음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놀랍지 않게도 나는 매일 일기를 쓴다. 그리고 이전에는 매우 가끔씩, 힘든 일이 있을 때만 썼다. 지금은 일기에 즐거운 일을 더 많이 쓴다. 나름 깜짝 놀랄 만큼 드라마틱한 차이가 있는데 그건 다음 글에서 하나씩 써보려고 한다. 나의 예전 일기를 들추어보고 최근 일기를 바라보는 식으로 진행하지 않을까 싶다. 혹시 몰라 말하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긴 차이다. 두 번 말하지만 마냥 우울한 글로만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이다. 당연히 우울한 글은 나오겠지만 내가 어떻게 극복했느냐가 중심이다. 


사실 이 글이 어떻게 끝맺음 지어질지는 나도 모르겠다. 진짜로 마르크스주의 얘기를 하는 글이 될 수도 있고 노자처럼 안빈낙도하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갑자기 우경화되어 자수성가 사업 성공 신화를 쓰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아마 셋 다 아닐 가능성이 클 테니까 안심하고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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