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산 Oct 27. 2024

아버지 죽이기 (4)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모든 조사를 받고 진술서까지 쓴 다음 나오자(조사라기엔 매우 짧은 질답이 몇 번 오갔을 뿐이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 노을에 의해 붉게 물든 복도를 은원과 함께 걸었다. 자습하러 온 아이들도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러브레터를 전하지 못한 채였다. 그것을 다시 찾으러 두고 올 상황은 여러모로 아니었다. 복도에 아이들이 돌아다니고 있던 데다가,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는 것을 기다리자니 세종실의 문도 닫힐 게 뻔했다. 나도 은원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은원의 눈치를 보았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던 때처럼 심장이 쿵쿵 울렸다. 나는 은원의 기색을 살피던 와중에 이상 신호를 발견했다. 아버지의 뒤통수에서 붉은 핏줄기가 하나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 내가 던진 소주병 때문일까? 왜 하필 지금? 어째서? 은원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그의 팔목을 잡아챘다. 내 표정이 어지간히 심각했는지, 은원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너, 머리… 머리에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걸 보는 게 처음이어서인지 그 대상이 아버지의 몸이어서인지 모를 일이었다. 은원이 손을 뒤로 뻗어 뒤통수를 더듬었다. 손에서 붉은색 혈흔이 묻어난다. 은원 또한 입매가 굳었다.

"이거 언제부터 이랬어?"

"나도 모르겠어. 어제 머리 맞아서 그런가? 왜 이러지? 아파?"

"아니, 아프지는 않아. 출혈이 많지도 않고."

"그래도 머리인데.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대화 사이에 잠시 마가 뜨자, 배경음처럼 어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주문을 읊는듯한 목소리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은원을 보고 그렇게 말했지만 그럴듯한 대답을 바란 질문은 아니었다. 그 말로 인해 공포심이 가중될 뿐이었다. 정체 모를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지, 뚜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주문 소리가 커져만 갔다. 오싹했다. 언젠가 보았던 여고괴담 영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복도 끝에서 다가오는 인영은 공포 영화에서 자주 보던 모습이 아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짧은 머리, 예쁘장한 코. 허여멀건 한 피부. 진장미다. 장미는 계단 가장 위에서 아래에 있는 우리를 내려다봤다.

"헉. 장……."

나는 까치발을 들고 은원의 입을 막아버렸다. 너랑 장미랑 절친인 거 아는데, 넌 지금 내 아빠라고. 정신 좀 차려. 본분을 다하란 말이야! 나는 눈빛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고는 은원의 팔목을 붙잡고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너네 뭐야."

냉랭한 목소리. 진장미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므로 당연했다.

"너야말로 뭐야?"

"그 아저씨 누군데. 왜 우리 학교에 있어."

나는 진장미의 앞에서 은원을 우리 아빠라고 말하는 것이 꺼려졌다. 치한을 잡은 게 짧은 사이 소문이 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진장미가 보기에는 모르는 아저씨랑 같이 학교에 온 꼴이려나. 그렇다면 굳이 가르쳐줄 이유는 없다. 은원에게 입 모양으로 말한다. '가만히 있어.' 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쌀쌀맞은 목소리를 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 가서 공부나 해."

이 말은 내가 듣기에도 조금 유치했다. 고고한 진장미가 상대해주기 싫게끔 굴려는 것뿐이었지만, 나한테도 내 말투가 듣기 싫어서 문제였다. 하지만 진장미는 예상과 달리 물러서지 않았다. 진장미 성격에 자존심이 꽤 상했을 텐데도 의외다. 장미는 은원을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야, 그거."

"그거?"

"그래, 그거. 그거 시체 아니니?"

온 몸의 피가 다 식는 기분이었다. 나는 새하얀 낯빛으로 장미를 올려다봤다. 그래, 너 무당집 딸이라 이거냐. 지레 찔려서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게 더 수상해 보이는 것도 몰랐다.

"말 함부로 하지 마. 우리 갈게."

나는 은원의 손을 붙잡고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야, 조심해! 너 지금 그게 뭔지 알고 있지!" 텅 빈 복도에 진장미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린다. 진장미의 말은 틀린 게 없다. 진장미는 늘 아플 정도로 옳은 소리만 한다. 내가 잡고 있는 것은 시체의 손이다. 아버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이 안에 든 게 누구의 영혼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동급생 여자애의 영혼일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추측뿐이다. 어쩌면 나는 이미 미쳐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진장미의 눈에 우리는 어떻게 보이는 걸까. 그 애는 귀신을 볼 줄 알았다. 그 애의 눈에 귀신에 씐 것은 누굴까.

우리의 뒤를 진장미의 목소리가 따라온다. 목덜미에까지 닭살이 돋는 주문이다. 얼핏 불경을 외는 불자나 성경을 외는 신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진장미의 목소리가 원래 저랬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우렁우렁한 목소리는 복도를 거쳐 우리에게 닿는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어떻게 된 거야?"

"몰라."

"장미가 우리를 어떻게 알아봐?"

"몰라."

"너 장미랑 아는 사이였어?"

"모른다고!"

나는 은원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성질을 부렸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서 그랬다. 정작 생전의 아버지에게는 한 번도 목소리를 높여본 적 없는데도, 은원이 아버지의 얼굴로 순진한 표정을 하고 나를 쳐다보면 버럭 화를 내고 싶어졌다. 그 애가 내는 목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 그 애가 나를 지켜준 것은 우리 아버지의 몸. 나는 손에 닿는 단단한 팔이 시체의 것인지, 아버지의 것이지, 그 애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진장미라면 뭔가 알고 있을까?

우리는 미친 듯이 달렸다. 내가 앞서나가면 은원이 뒤따랐다. 집까지 가는 길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도 우리의 정체가 들키지는 않았을까 겁이 났다. 그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원은 뭔갈 캐묻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모두 무시했다. 곤란한 질문에는 답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걸 생각할 정신이 없기도 했다. 결국 우리 집 앞까지 와서야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골목 어귀를 뱅뱅 돌며 방언을 쏟듯이 중얼거렸다.

"진장미가 이상한 걸 웅얼거리니까 머리에서 피가 나기 시작한 거야. 다 진장미 때문이야. 걔가 날 싫어해서 그래."

"장미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산만하게 움직이던 발이 멈칫한다. 은원은 장미가 무당집 딸인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의외였다. 둘 사이가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걸까. 진장미는 어린 시절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따돌림을 당했고, 그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먼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걔는 어떻게 해서든 숨겼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한들 고등학교 친구 중에 제일 친해 보였던 은원에게조차 말하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 새삼 독한 계집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사실을 은원에게 밝힐지 말지 고민했다.

남에 대한 말을 함부로 옮기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은원은 이미 죽었고, 진장미 때문에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으니 예외로 쳐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죽은 사람 앞에서도 이렇게 조심해야 할 이유가 있나.

"진장미가, 원래 그런, 그런… 신력? 이런 게 있어."

귀신 보는 애, 이런 소리 안 하려고 단어를 고르다 보니 신력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귀신을 본다고?"

"......그 비슷한 건데."

은원은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그 이상으로는 묻지 않았다. 몇 년간 딱 붙어 지내며 나름대로 짚이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진장미를 떠올리는 그의 표정은 유례없이 무거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은원의 얼굴이었다면 몰랐겠지만, 아버지의 얼굴이니 알 수 있었다. 나는 은원의 짝사랑 상대가 진장미인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단지 왜 하필 진장미일까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했다. 진장미는 은원과 반대로 날카로운 인상에 나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큰 키가 특징인 여자애였다. 하도 예전부터 일면식이 있던 사이여서인지 그 애가 누군가에게 연애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여자로 보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고백한다며. 다시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아까 봤는데 말도 안 나오더라… 머리에서 피도 나고.”

은원은 내가 고백 상대를 아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어쩌면 자신이 이미 얘기했다고 착각하는 걸 수도 있다.

"머리에 나는 피는 좀 어때?"

"얼마 안 나서 괜찮긴 한데. 피가 안 굳는 거 같아. 지혈이 안 돼."

"뭐?"

"병원 가볼까?"

"미쳤어?!"

나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펄쩍 뛰었다. 병원은 절대 안 됐다. 지금은 저녁이고, 그러면 응급실에 가야 했다. 병원에서 시체를 보면 뭐라고 말할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게다가 병원비가 얼마가 나올지 모르는데 병원에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릴 적에 내가 아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학원이든 학교든 절대 빠지지 못하고 쓰러질 때까지 버텼다. 안 그래도 내가 먹고 자는데 들어가는 돈이 얼마인데, 병원비까지 더 쓰는 건 아까운 일이었다. 힘겨운 목소리로 엄마나 아빠한테 전화를 걸면 '쓰러져도 학교에서 쓰러져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새벽에 위염으로 쓰러졌을 때는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정도로 아팠다. 집이었고 세 식구가 다 있었지만, 모두가 나를 모르는 척했다. “나 응급실 가면 안 돼?” 몇 번이고 그렇게 물었지만 아버지는 그게 다 엄살이라며 일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집에 낡은 소나타가 하나 있었고 그걸 운전할 수 있는 건 아버지뿐이었기에, 내가 병원에 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정하는 건 아버지의 오롯한 권한이었다. 엄마는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많이 아프니?“하고 물으며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새벽 두 시가 되도록 방과 화장실을 오가며 토하자 아버지는 그제야 차를 끌고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너 별거 아니기만 해봐라”하고 으름장을 놨다. 가서도 진료를 기다리는 데에 30분 가까이 걸렸는데, 아버지는 아프지도 않은데 병원에 오니 오래 걸리지, 하고 집으로 먼저 가버렸다. 나는 긴장한 탓인지 더는 토가 나오지도 않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를 때까지 덜덜 떨었다. 아까는 그렇게 아팠는데 왜 지금은 토가 안 나올까, 지금 소리 지르면서 바닥에 쓰러지면 내 진료를 먼저 봐줄까, 여기까지 왔는데 크게 아픈 게 아니라면 아빠가 화낼 텐데, 제발 큰 병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빌었다. 차라리 암이거나 백혈병이거나(그때는 알고 있는 병이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하는 죽을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아빠가 화내지도 않을 테고 앞으로도 아플 일이 있을 때 눈치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엑스레이를 찍고 의사한테 신경성 위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게 얼마나 큰 병인지 몰라서 안도해야 좋은지 아니면 불안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수액을 맞으며 누워있었고 증세는 씻은 듯이 나았다. 그날 비용은 20만 원 남짓이 나왔다. 나는 금액을 보고 응급실에 온 것을 크게 후회했다. 딱 반나절만 버텼으면 이 헛돈 쓰지 않아도 되는데. 그 뒤로는 줄곧 위염이 도지더라도 절대 병원에 가지 않았다.

"병원 가면 안 돼."

"왜? 아니, 이거 너희 아버지 몸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지금 연 병원이 어딨어. 응급실로 가야 하는데."

“가면 되잖아. 어제 어머니가 주신 돈도 남았고.”

“야, 돈 아까워서 거길 어떻게 가.”

은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겨우 그것 때문에?"

"겨우 그거?"

나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화가 났다. 은원이 어떤 의도로 말했는지 모르지 않았다. 은원은 나를 화나게 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은원이 은원의 세계에서 겪은 일을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것이 싫었다. 나는 은원의 앞에서 내 세계의 일을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데 말이다.

누군가를 볼 때마다 발휘되는 나의 나쁜 버릇이 있다. 바로 가난을 겪어본 적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나보다 가난한 애를 본 적이 없다. 나는 가난을 겪었기에 어떤 것이 가난해 보이는 태도인지 알고 있다. 나는 가난하기에 가난을 숨길 줄 안다. 가난한 이들은 모두 그렇다. 내가 나보다 가난한 애를 본 적 없는 건 그 애가 나보다도 가난을 잘 숨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은원은 가난을 모른다. 모르는 것이 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걸 봐줄 만한 여유가 없다.

예컨대 그런 것들을 견딜 수가 없다. 은원 같은 애들은 자기가 어느 동네에 살고 어느 아파트 어느 동에 사는 것까지 자랑스레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는 동네가 어딘지 조차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은원은 최근에 새로운 TV나 새로운 침대를 샀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은원은 대중목욕탕에 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속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런 것 따위를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은원이 해외여행을 갔다는 사실을 얘기하는 동안 나는 입도 벙긋하지 못한다. 나는 그런 데에서 전부 상처를 받는다. 어쩌면 은원 그 자체보다는 은원이 은원으로 자란 것에 화가 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은원이 아버지의 몸을 하고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 몸이 내게 “병원에는 또 왜 간다고 지랄”이냐 할 수는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병원에 가면 되지 않냐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야, 너 말 쉽게 한다. 너 진짜 모르는 거야,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거야? 너 눈치 없어?”

“왜 갑자기 정색을 하고 그래? 난 너희 아버지 몸이라서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물어본 거지…….“

“진짜 그런 거 맞아? 남의 돈이라 쉽게 쓰는 거 아니고? 너 편의점에서는 얼마를 처먹고 사우나에서는 또 얼마를 처먹은 줄 알아?”

“야, 그건…….”

“트럭에 치였으면 곱게 뒤져야지 남의 몸 훔친 주제에 남의 돈까지 다 빨아처먹으려고 들어.“

"......."

그 애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봇물이 터진 것처럼 말을 멈추지 못했다.

“너는 아플 때마다 제때제때 병원 가는 인생 살아서 좋겠다. 나는 급성 위염일 때도 밤새서 아침 열 시까지 버텼고, 우리 엄마는 종일 서서 일하느라 무릎에 물 찼을 때도 목발 짚고 출근하고, 우리 할머니는 치매라 집도 못 찾아가는데 병원도 못 가셔. 돈이 없어서. 너는 씨발 눈치가 없냐, 왜. 그러니까 죽었는데 고백이나 하려 그러지. 죽은 사람이 고백하는데 좋아할 애가 어딨겠냐.”

꾸역꾸역 마지막 말까지 뱉으면서는 억울해서 눈물까지 나왔다. 그렇지만 나는 끝까지 아버지를 노려봤다. 아버지의 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아버지의 몸이 풍선처럼 공기가 빠져 쭈글쭈글 쪼그라드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나 감당하기 힘든 줄 몰랐다. 내가 눈앞에서 꺼져줄게, 이 정도면. 너 어차피 너희 아버지랑 절연했고, 난 너희 아버지 몸 훔친 거니까. 그냥 가지 뭐."

"어, 그래. 가."

은원이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나는 잡지 않았다. 걔는 내게 흰 봉투를 돌려주고선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걔가 나한테 봉투를 왜 주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내심 걔가 그걸 아예 가져갔으면 했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고서야 내가 또다시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버림을 받았다. 아버지의 영혼을 가진 아이에게 말이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버렸을 때를 기억한다. 처음은 버린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기껏해야 '고아원에 보내버린다'는 협박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 협박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처였지만, 비슷한 말을 들을수록 점차 익숙해졌다.

'나는 널 고아원에 갖다 버려도 손해 볼 것 없어. 나는 잃을 게 없어.' 아버지가 자주 하는 소리였다. 마치 선심을 써서 나를 키워준다는 듯한 말투. 그래서 나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럼 나는 제발 버리지 말라고, 엄마 아빠랑 떨어져 살기는 싫다고 몇 번을 애원해야 했다. 고아원에 간다는 것보다도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하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이 세상에 나를 제대로 사랑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받은 적 있는지 의심스럽다. 정말로 사랑했다면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 적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버지의 마음이 식은 게 나 때문이라고 느껴지니까. 내가 애초부터 사랑받을 수 없는 애였다는 사실 만큼 내가 누군가의 정을 다 떨어뜨려 놓을 만큼 끔찍한 애라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번에도 나는 은원에게 완전히 상처를 주고 말았다. 매번 이런 식이다. 은원에게 달려가 내 어디가 싫어서 떠났는지 묻고 싶다. 내가 처음부터 싹수가 노래서 도저히 봐주기 힘든 애로 보이는지, 아니면 내가 말을 못되게 해서 떠난 건지 알고 싶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나를 떠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아버지와 은원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 적 있을까? 나는 어디서 사랑받고 자란 딸이라는 이야기를 해도 될까? 나는 왜 언제나 아버지의 뒷모습밖에는 기억할 수 없는 걸까.

나의 비극은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동물은 평생 아버지를 모르고 산다는데 왜 인간은 그럴 수 없는 건지.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나를 본다.

걸핏하면 화를 참지 못하고, 사과할 타이밍을 놓치고, 소중한 사람을 흘려보낸다.

이전 03화 아버지 죽이기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