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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Oct 27. 2024

아버지 죽이기 (5)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2

나는 항상 버림받기만 하는 것 같다. 아빠가 그랬고, 진장미가 그랬고, 이은원이 그랬다. 아마 그건 전부 내 잘못일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기엔 지나치게 모나고 악해서 그럴 것이다. 3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진장미와 내가 아직 친하던 때의 이야기다.

진장미와 나는 흔히들 말하는 친구 없는 애들이었다. 왕따 둘이 같이 다닌다고 원색적인 놀림을 받았지만 그래도 우린 개의치 않았다. 물론 나도 장미의 떡진 머리나 쿰쿰한 냄새가 가끔은 싫고 창피했다. 아무렇게나 기른 손톱이나 뒤집힌 옷깃이 그 애를 돌봐주는 어른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하지만 매일 똑같은 겉옷을 입고 나가는 나 같은 애나 걔나 남들 눈엔 별로 다를 바가 없었을 거다. 내가 남몰래 장미를 업신여기고 있어 봐야 장미랑 함께하는 내 신세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주 불순한 의도로 장미를 귀중하게 대했다. 내 친구 장미가 특별한 아이라서 함께 하는 나 또한 특별해지도록 말이다. 나는 장미의 침착한 태도나 예리한 눈썰미를 높이 샀다. 장미라는 이름 역시 그 애에게 과분하지 않고 꼭 맞는 것 같았다. 점차 장미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됐고 나는 내 반쪽이 그 애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장미가 내게 특별해졌던 건 그 애가 내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난 너처럼 살고 싶어.” 특별할 것도 없는 날이었다. 쉬는 시간에 둘이서 사물함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무심코 던진 농담에 장미가 웃음을 터뜨린 다음이었다. 나는 이전까지 한 번도 그런 종류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나처럼 끔찍한 삶을 사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보아도 장미가 나보다 나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장미는 부모님께서 바쁘게 지내는 동안 잠시 할머니 댁에서 지내는 것뿐이고, 적어도 나보다는 부유했다. 그때 우리 아빠는 종일 집에서 일없이 노는 게 예사였기 때문에 부모님이 일로 바쁘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부러움의 요소였다.

또 나는 누가 나보다 돈이 없는지 있는지는 귀신같이 파악했다. 장미는 학교가 끝나고 문방구에서 간식거리를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는 돈이 있었다. 매주 용돈을 몇천 원씩 받았고 가끔가다 주말에 부모님을 만나면 놀이공원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는 일도 있었다. 나는 내가 장미보다 낫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 장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너 재밌잖아. 가끔 누가 말 걸어도 잘 대답하고, 잘 지내고. 난 그렇게 못 해.”

“너도 그러면서 뭘.”

“난 모르는 애가 말 걸면 얼마나 긴장하는지 몰라. 근데 넌 농담까지 하잖아. 교무실 가면 아는 쌤들도 많고. 또……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줄도 알고.”

장미는 몰랐겠지만, 나는 오래도록 그 말을 곱씹었다. 한편으로 무척 기뻤고 또 한편으로는 무척 슬펐다. 무엇이 기뻤냐면 내가 애써서 멀쩡한 척하는 게 누군가에겐 정말로 통했다는 사실이 좋았다. 가까운 사이인 장미에게도 내가 부모에게 미움받는 데다 우리 가족이 전부 미쳐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틈만 나면 죽을 생각을 할 정도로 괴롭고 하루에 몇 시간씩을 눈물로 보낸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나 보다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장미가 내 인생을 속속들이 안다면 내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슬펐다. 누구도 나 같은 인생을 바라지는 않는다. 이렇게 가까이 있고 나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나를 좋아하는데 나를 온전히 알게 되면 나를 바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슬펐다. 나는 오히려 장미처럼 살고 싶었다. 돈으로 싸우는 소음 없고 지하로 내려가지 않아도 되는 삶이 부러웠다. 하지만 장미에게 그 얘기를 차마 해주지는 못했다.

“있지, 내 생일 파티 와줄래?”

진장미는 자기 생일 전날에 그렇게 말했다.

난 생일 파티 같은 건 해본 적 없었다. 브랜드 피자 가게나 패밀리 레스토랑, 혹은 집에서 하는 생일 파티조차도. 내 생일 선물을 주는 건 평생 엄마뿐이었다. 엄마가 내게 생일 선물을 주면서 ‘엄마 아빠가 같이 주는 거야’ 라고 할 때, 나는 그게 엄마만의 마음인 걸 알았다. 언제는 딱 한 번, 엄마가 뒤늦게나마 눈치를 주었는지 아빠가 퇴근길 지하철역 서점에서 파는 작은 영어 사전을 사온 적이 있었다. “이걸로 공부해라.” 하는 말이 전부였다. 그 영어 사전이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그 뒤로 아빠는 집을 나갔던 첫해에 내게 생일 축하한다는 짧은 문자를 보낸 적 있는데, 나는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서 대꾸하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장미의 생일 파티에 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미는 나에게 과한 선물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아마 장미의 할머니가 차려주신 미역국이나 불고기 따위를 먹으며 평소처럼 방과 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을 터다. 평소와 같은 일인데 ’생일 파티‘라는 이름을 붙이니 특별해 보였다. 나는 장미에게 조금 질투가 나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아마 나는 평생 부모님께 감히 생일 파티를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 가지고 싶은 선물 있어?”

“음, 글쎄, 우정 반지?”

“알겠어. 내일 학교 끝나고 너희 집으로 갈게.”

당시 유행하던 우정 반지는 학교 앞에서 천원에 파는 물건이었다. 평소에 내가 장미에게 얻어먹는 게 있으니 못 사줄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일이 계산적으로 굴고 싶지 않았지만, 내 일주일 용돈은 천원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게다가 장미는 나보다는 잘살았으니까. 귀가 잘 안 들리고 눈이 잘 안 보이는 무당 할머니만이 그 애의 유일한 가족이었지만, 그 애의 이혼한 부모님이 양육비를 매달 부치는 듯했다. 장미는 종종 신방에 있는 돈을 멋대로 가져오는 모양이었고, 할머니께서도 장미가 안쓰러운지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눈치였다.

나는 그 사실을 방패 삼아 그 애를 이용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려 A4용지에다가 장미를 위한 편지를 적었다. 돈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면 마음이라도 주고 싶었다. 형식적인 말밖에 꺼내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진솔하게 편지를 적었다. 놀아줘서 고마워. 너 없었으면 정말 친구 없었을 거야. 말로는 차마 인정할 수 없었던 것들을 글로 쓰니 한결 인정할 수 있었다.

“엄마, 나 내일 장미 생일 파티 가려고.”

“뭐 안 사다줘도 돼? 선물은?”

“우정 반지.”

엄마는 옷장을 한참 뒤적이며 “있어 봐, 엄마가 돈 줄게. 걔가 네 친구인데 더 좋은 거 사줘야지.” 했다. 나는 “안 그래도 되는데……”했지만 내심 좋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엄마는 내게 만 원짜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으로 무엇을 사면 좋을지 꿈에 부풀었다. 그날따라 엄마의 눈 밑이 유독 푹 꺼져 있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나는 그때 엄마의 불행을 버거워했다. 엄마는 내 앞에서 종종 몸의 통증을 호소했고 공장에 나가기 싫다는 투정도 부렸다. 나는 그걸 성심껏 들어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엄마가 나를 부양하는 것을 포기해버릴까 봐 겁을 먹었다. 그러니까 나는 어느 정도 불손한 마음으로 엄마의 말을 들어준 것이다. 엄마까지 나를 버리기로 작정하면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나의 생존을 위해서 엄마를 이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엄마가 종종 아프다는 이유로 저녁을 차려주지 않으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워야 했는데, 그럴 때면 자꾸만 짜증과 슬픔이 몰아닥치는 게 죄스러웠다. 그런 감정이 싫었다.

엄마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조심스레 티 내면 당황하는 모습도 보였다. 언제는 미술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고 미술 전공으로 나가면 좋겠다는 말을 했고, 나도 직전의 사생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터라 어쩌면 이게 내 길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부풀었던 적 있다. 그래서 그날 용기를 내 엄마에게 미술 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생전 무엇도 사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없었으니 그게 첫 시도였다. 하지만 엄마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해놓고는, 그날 밤 술에 취해 내 손을 붙잡고 울면서 학원에 보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지 않다고 말해서 달라지는 게 없었기에 억지로 괜찮다고 말한 것이다. 나와 엄마 사이에는 분명 잘못한 사람이 없는데, 우리가 자꾸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 싫었다.

다음날 방과 후에 나는 문구점 앞을 서성이며 진장미를 기다렸다. 그때 누군가에게 전화가 온다. 외할머니였다. 나는 외할머니댁에 가면 제법 재롱을 부리며 귀여움받고는 했지만, 평소에 살갑게 통화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무언가를 직감한 사람처럼 통화버튼을 누르는 것이 꺼려졌다. 들어서는 안 되는 소식을 들을 것만 같았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서야 억지로 초록색 수화기 모양을 슬라이드 했다. 노인 특유의 갈라진 목소리가 전파를 통해 전해졌다.

“소선이니? 얘, 너 이리로 좀 와야겠다. 너희 엄마가 일하다 쓰러졌어.”

몇 번 본 적도 없는 드라마의 극적인 장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암이라거나 불치병이라거나 하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혹시 현실이 될까 싶어 입에도 담지 않았다.

“무, 무슨 일인데요? 엄마 많이 아파요?”

“영양실조래. 심각한 건 아니고, 그래도 와보긴 해야 할 것 같다.”

영양실조라는 단어는 종종 TV 광고에 나오는 후원재단이 언어도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의 불쌍한 아이들을 노골적으로 비추며 그들 중 대부분이 영양실조이니 한 달에 3만 원을 후원하라는 말을 꺼낼 때나 들어봤다. 내가 화면 속에서 봤던 영양실조에 걸린 애들은 모두 비쩍 말랐고 큰 눈이 움푹 들어가 슬픈 소를 연상케 했었다. 영양실조라는 단어와 엄마는 도통 매치가 되지 않았다.

난 그제야 엄마가 하루에 밥을 얼마나 먹지 않는지 깨달았다. 엄마가 밥을 차리기 힘들다는 이유로 나 혼자만 컵라면을 챙겨 먹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다. 나는 당연히 엄마가 회사 근처에서 무언가를 먹고 오는 줄만 알았다. 이걸 지금에서야 눈치챘다는 게 바보 같았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엄마의 인생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엄마는 아마도 나를 낳고 불행해진 것 같다. 사랑받는 셋째 딸로 평범하게 살던 엄마는 대학을 졸업하고 괜찮은 기업에 입사했지만, 아빠와 결혼 후 나를 낳자 퇴사했다. 그리고 아빠가 도박에 손을 대고 가세가 기울자 다시 일을 나갔다. 엄마는 무릎에 물이 차서 몇 주는 목발을 짚고 다니거나, 양손에 물집이 잡히거나, 이전보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 그리고 언제서부터 점점 살이 빠지더니 오늘은 일하다가 쓰러지기까지 했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엄마는 이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괘씸하게도 나는 내가 엄마만큼 힘들지 않았다는 것에도 충격받았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종종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벽에 머리를 박아버리고,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피멍이 들 때까지 내 팔을 깨물지만, 멀쩡히 학교에 가고 친구 생일 파티도 간다.

하지만 엄마는 그럴 수가 없다. 엄마는 나보다 더 힘들다. 나는 엄마의 고통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나는 엄마의 고통을 덜어줄 수조차 없다. 엄마는 내가 있어도 힘들다. 그럼 나는 엄마의 짐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괴로웠다.

6인실짜리 병실에 들어서자 엄마와 외할머니가 있었다.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야윈 듯한 엄마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엄마가 나를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 소선아. 엄마가…….”

나도 같이 눈물이 나왔다. 나는 엄마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왜 눈물이 나는지는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그냥 엄마가 불쌍하고 내 꼴이 안 돼서 울었던 것 같다. 엄마는 자기가 지금 우울증이고 공황장애가 있고 힘들어서 영양실조로 쓰러졌다는 얘기를 해주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조금 있으면 지나갈 병이고 자기도 일을 일주일 쉬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한테 더 쉬어야 하지 않느냐고 강권할 수 없는 데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엄마가 그렇게 일하는 건 다 나 때문인데 나는 엄마가 아픈데도 계속 일하게 만드는 원인이구나 하고……. 내가 차라리 학교 같은 건 다 그만두고 어디로든 돈을 벌러 나가서 엄마가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외할머니댁에서 엄마가 퇴원할 때까지 지내기로 했다. 누구도 아빠에게 나를 맡길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는 게 웃겼다. 비어 있는 외삼촌의 방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아서 마음이 편했다. 그렇지만 그 며칠을 마냥 편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번갈아 가며 내게 몇 말씀을 하셨다. 네가 있는데 엄마가 왜 저렇게 됐는지 묻는다거나. 얼마 전에 TV를 봤는데 거기엔 12살짜리 어린 애가 혼자서 알아서 밥도 차려 먹는 모습이 나왔는데, 너는 왜 중학생이 되어선 혼자서 밥을 차려 먹지 못해서 엄마를 힘들게 하냐고 하거나. 하여튼 니 애비가 잘못이고, 김씨 집안 사람들은 돼먹지 못했다거나. 내게 직접적으로 말할 때도 있었고, 내가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다 들으라는 듯이 거실에서 큰 소리로 말을 할 때도 있었다. 나는 울음을 삼키는 데에 온 집중을 하느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동의했지만, 외조부모님은 나와 아빠를 가해자로, 그리고 또 엄마를 피해자로 보는 것 같았다. 그들의 눈에 나는 아빠의 편이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무척 놀랐다. 나는 내가 엄마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아빠와 나를 같은 편에 묶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 또한 아빠 때문에 너무 큰 고통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세 가족의 편을 가른다면 그건 틀림없이 아빠가 가해자고, 엄마와 나는 피해자일 것이라 여겼다. 엄마의 눈에 나와 아빠가 똑같은 족속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그때 처음 느꼈다.

나는 아무도 내 고통에는 주목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피로했다. 내가 필요 이상의 비난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아버지로 인해 많은 부분이 규정지어지고 만 것이다. 내가 아빠를 아빠로 부르는 탓에 받는 벌이었다. 지금껏 나를 아껴준다고 생각했던 외조부모님의 원색적인 구박이 나를 향한 배신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떻게 한순간에 태도가 변할 수 있는 것인지 믿기지 않았다.

그러던 도중 외조부모님은 애초부터 나를 사랑했던 적이 없고 엄마의 딸인 나를 사랑했던 것뿐이라는 것을 깨닫자 마음이 편해졌다. 엄마가 사랑하는 나를 아꼈을 뿐 엄마를 괴롭히는 나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 진작 알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그들의 앞에서 재롱을 떨거나 용돈을 받을 때는 내가 정말로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애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착각을 안고 이날까지 살아온 것이 창피했다. 누군가 귀띔이라도 해줬다면 나는 그들이 내 고통 또한 알아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았을 텐데. 따뜻한 위로를 바랐던 게 부끄러웠다. 내가 그 정도로 멍청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말로 엄마가 저렇게 된데에 내 책임이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엄마 덕분에 죽지 않고 사는데 엄마는 내가 있는데도 쓰러질 만큼 힘들었구나 싶었다. 엄마의 힘듦에 있어 내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펐다. 정말이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딸이었다.

그런 엄마에게마저 일말의 원망이 치미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난 엄마가 힘들까 봐 나 힘들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한 기억이 없는데. 엄마는 참 편리하게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쓰러졌구나. 이제 누구든 엄마가 힘든 건 알겠구나. 엄마는 지금 내가 이곳에서 구박을 받는 것도 모르겠구나. 엄마를 미워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엄마한테는 내가 소중했던 걸까. 날 보면서 모든 고통을 이겨낼 만큼 소중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여겨지기를 바라면 안 되는 걸까. 누군가 나를 그 정도로 좋아해주면 좋겠다. 나를 보고 힘을 내주면 좋겠다. 엄마한테는 도통 내가 중요한 존재가 아닌 것 같다. 엄마의 인생을 망친 것은 아빠고, 엄마가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도 아빠고, 거기에 있어서 내가 엄마가 버틸 만한 이유조차 되지 못한다면 나는 이 집안에서 대체 어떤 역할인 걸까.

할머니 할아버지는 내가 엄마를 힘들게 만든 가해자라던데, 나는 차라리 그런 역할이라도 분담된 것이 다행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단지 원인에 불과하다면 나는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가난하다고 따돌림당하는 것도 버티고, 하교 후에 아무도 반겨주는 이 없는 집에서 매일 컵라면이나 먹는 것도 버티고, 아빠가 패악질 부리는 것도 그럭저럭 버텼는데. 그런데도 나는 엄마보다 덜 힘들고 힘이 되어주지도 못하고 대체 뭘 했어야 누가 날 알아줄 수 있었을까.

그럼 나는 여기서 더 얼마나 힘들어야 누가 알아주는 것일까. 내 고통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내가 죽을 정도로 힘든 게 아니라면, 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힘들어야 날 이해해주는 누군가 생긴다는 뜻일까. 차라리 엄마보다 더 고통받고 싶다. 감히 할 만한 생각이 아니었지만, 그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당장에 쓰러질 만큼 고통을 겪는다면 누군가 알아주기라도 할 텐데. 내게도 엄마에게 있어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 같은 존재가 있어주면 좋겠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내가 힘든 걸 제발 좀 알아주면 좋겠다.

나는 문득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진장미였으면 했다. 당장 진장미한테 전화를 걸고 ‘나 오늘 정말 힘들었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냐면 장미는 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유일한 내 친구였기 때문이다. 나는 장미의 환상을 깨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걸 말한다면 장미는 나처럼 살고 싶기는커녕 내 곁에 있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엄마한테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데 어떻게 친구에게 털어놓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내 이런 행동에 질려 진장미가 나의 아버지처럼 떠나버리면 어떡한다는 말인가? 도저히 자존심이 상해서 허락할 수가 없었다. 나는 윙윙 울리는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아예 꺼버렸다. 꺼진 액정을 계속해서 노려보았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벽에 머리를 박았다. 쿵, 쿵, 쿵. 머리에 둔탁한 고통이 느껴진다. 골이 울리고 눈앞이 어질어질했으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게 내가 세상에 표현할 수 있는 감정 표현의 끝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내가 상처입힐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나는 할머니집의 외삼촌 방에서 웅크리고 누워 울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진장미에 대한 상상을 했다. 진장미가 저 문을 열어젖히고 왜 생일 파티에 오지 않았냐고 묻는 상상 말이다. 그럼 나는 엄마가 쓰러져서 못 갔다고 대답한다. 장미는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려준다. 장미는 내게 힘들지 않았냐고 물으며 나를 걱정하고 위로해준다. 장미는 내 편을 들어준다. 어머니께서도 너무하시네. 네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는데 몰라주셨다니. 장미는 나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함께 밥을 먹어준다. 나는 장미에게 내가 겪었던 모든 일을 털어놓는다. 그러면 장미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잘못한 게 없어. 너희 아빠도 네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거야. 네가 겪은 일은 단지 너희 아빠가 그런 사람이어서 일어난 일이야. 네가 아니라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진 않았을 거야. 그건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날 할머니 댁에서 학교까지 50분에 걸친 기나긴 등교를 하고 나면 싸늘한 표정의 장미가 묻는다.

“어제 생일 파티 왜 못 왔어?”

입이 차마 열리지 않았다. 할머니 댁에서 바로 오느라 편지도 선물도 집에 두고 왔다. 그 편지에는 ’너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지 못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아‘ 라고 적혀 있었는데도 말이다.

“네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

“야, 난……. 계속 너 기다렸어. 할머니가 너 오지 않겠구나 하시고 밥상 치우려고 하셨는데 내가 계속 말렸어. 저녁 9시, 10시까지 그러고 있었어.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걱정이 되더라. 전화는 왜 안 받았어?“

“…….”

또 멍청하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 씨발 병신이야?‘, ’그냥 오늘 이렇게 같이 뒤질래?‘, ’왜 너희 엄마가 그렇게 됐다냐?‘ 그런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다.

“너 진짜 말 안 할 거야?“

“어.”

“내가 마음대로 생각해도 상관 없어?“

“어.”

“너 도대체 뭐가 문제야? 난 너 걱정했어.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이게 친구한테 하는 태도야?”

“그만 좀 물어봐. 제발. 네 마음대로 생각해.”

교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오가자 시선이 쏠렸다. 그렇게 사이좋던 왕따 둘이서 싸워대니 다들 놀란 얼굴이었다.

나는 이제라도 엄마가 쓰러졌다고 털어놓으면 착한 진장미가 난 그런 줄 몰랐어, 미안해, 하고 사과할 걸 알았다. 그렇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교실에서 애들이 듣고 있었을뿐더러 진장미 앞에서는 더더욱 약점을 꺼낼 수 없게 됐다.

“하……. 난 너 감당 못 하겠다. 너한테 고마운 일 진짜 많았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했나 봐. 너한텐 내가 아무것도 아니지, 아주.”

“…….”

“갈게. 계속 그렇게 살아.”

진장미의 깊은 한숨이 귓가를 울린다. 나를 저버린 모든 이들은 꼭 그런 한숨을 남기고 떠났다.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방학이었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장미와 나의 반이 갈라졌기 때문에 우리 사이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우리가 같은 고등학교에 온 건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중학교와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에 함께 진학한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사이좋았다는 것을 아는 아이도 없었다.

진장미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달라졌다. 걔는 어느 순간서부터 잘 차려입고 다니고 비싼 지갑 같은 것을 들고 다녔다. 주변에는 친구가 많았으며 이은원도 그중 하나였다. 그 애의 불행은 나의 것과는 달랐다. 난 어쩌면 그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진장미의 가난과 불행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역경에 불과한 것. 세월이 흐르면 점점 이겨낼 만한 것이 되고 그 애는 ‘평범’에 속하는 이들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 이곳에 나를 홀로 남기고 말이다.

반면에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불행하다.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종종 복도에서 진장미를 마주칠 때마다 그 애를 붙잡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잘못했다는 말을 꺼내기에는 지나치게 늦었고, 나 역시도 친구라고 할 만한 것은 너밖에 없었다고 뒤늦게 고해하기에도 늦었다. 가끔가다 내 불행에 눈이 멀어 사리 분별이 힘들 때면 왜 너만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 것일까 원망을 쏟아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장미는 나와 함께하던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해 보였다. 그렇다면 이제 나와 영영 엮일 필요는 없다. 장미가 나 없이 행복하길 바랐다.

장미가 외웠던 의문의 주문이 머릿속을 스친다. 걔는 가끔 섬뜩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세상에 미련이 많은 귀신이나 우리 주변에 있는 귀신들을. ‘장례식을 왜 3일 동안 하는 줄 알아?’ 그 애의 낮은 목소리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장례식. 그래. 이은원의 장례식을 지금쯤하고 있을 텐데. 걔는 지금 어디로 가버린 거지. 설마…….

때마침 진장미에게 문자가 왔다. 3년 만이었다.

[이것도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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