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넬로페
“너 오늘도 친구 만나니?”
“응. 같이 도서관 가려고.”
“주말엔 엄마랑 좀 놀아주고 그래. 딸이라고는 너 하나밖에 없는데.”
“엄마도 놀러 가는 거 다 알거든.”
엄마는 최근 문화센터에서 요가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아주머니들과 친해졌는지 종종 근처 커피를 마시러 다니곤 했다. 난 엄마를 아버지가 없으면 안 될 사람으로 알았는데, 그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다. 정작 지금껏 아버지로부터 졸업하지 못한 건 나였다. 엄마는 엄마 나름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은원이 사라진 날, 내가 퉁퉁 부은 눈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이 상황을 엄마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엄마. 우리 학교에 어떤 애가 사고당한 거 알아?”
“어, 뉴스에서 봤어. 걔도 참 안 됐지…… 너도 걔랑 아는 사이였어?”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 문제였다. 나는 또 다시 눈물이 나오려는 걸 막지 못했다. 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응. 옆반. 장미 친구였어.”
내가 끝내 훌쩍이자 엄마가 “아이고.” 소리를 내며 나를 안아주었다.
“딸. 놀랐어?”
“아니, 슬퍼서……”
엄마한테서는 나랑 달리 포근한 냄새가 났다. 같은 섬유유연제에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데 엄마 품이 유달리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엄마는 내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엄마가 내가 겪은 일을 모두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떠난다는 건 참 슬프지. 그렇지만 울고 털어내면 돼.”
“하지만 걔처럼 좋은 애는 다신 못 만날 거 같은데.”
“걔랑 똑같은 애는 만날 수 없겠지. 오래도록 슬퍼해도 돼. 하지만 그때도 소선이 너는 외롭게 있지 않을 거야. 네가 얼마나 멋진 애인데.”
“그럼 아빠도?”
“응?”
“아빠도…… 언젠가 아빠가 없어도 괜찮아지냐구.”
“그럼.”
엄마는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엄마가 내게 해준 것을 생각한다. 아빠가 사라진 뒤 나와 엄마는 1년간 외할머니댁에서 지냈다. 외할머니댁도 사정이 좋지 않은 건 매한가지였다. 우리는 네 식구가 두 칸짜리 반지하 방에서 지냈다. 멀리서 일하는 외삼촌께서는 원래 그 집에 짐을 두고 가끔 들렀지만, 엄마와 내가 외삼촌의 짐을 밀어내고 방 하나를 꿰찼다.
나는 외조부모님이 불편했다. 내가 그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미워하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엄마가 쓰러졌을 때 들었던 폭언들이 계속 생각나 나를 괴롭혔다.
나는 종일 집에 숨죽여 있었고, 방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았다.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발소리를 내는 것도 꺼려져 살금살금 돌아다녔다. 그들이 잠들면 불을 끄고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봤다.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다. 집에 들어가면 내가 감정 없는 인형이 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몇 달이 지나도 후추가 있는 위치나 세제가 있는 위치를 몰랐다.
어릴 때처럼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살갑게 안길 수 없었다. 명절에 놀러 가서 느꼈던 감정과는 차원이 달랐다. 나는 그 집에서 늘 외부인이었다. 한 씨들의 세상에서 김 씨가 억지로 껴있는 것 같았다. 아빠가 있을 때와는 다른 고통이었다. 내가 신발을 나란히 벗어놓지 않거나 열쇠를 까먹고 외출할 때면 외할머니께서는 꼭 김씨 집안 사람이 문제라는 식의 말로 혼이 났다. 그것도 직접 혼나거나 하지 않고 엄마를 통해서 전해 듣거나 문 건너에서 중얼거리며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나를 불청객으로 여겼고 나도 집에서 딱 그만큼의 위치를 얻었다. 외식할 때는 자연스럽게 내가 빠졌고, 집에 손님이 오는 날에도 나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누군가 오더라도 나는 방에 콕 박혀서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도 이 집이 내 집으로 느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에게는 엄마도 아빠도 있었지만, 나는 이제 아빠도 없고 가끔은 엄마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곳이 가장 큰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엄마는 그때 크게 힘들어했다. 정신과 약을 꾸준히 처방받았으나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나를 붙잡고 눈물을 보이는 날도 잦았다. 엄마는 나까지 잘못되면 죽어버릴 거라는 말을 자주 했다. 엄마는 엄마를 견디는 것만으로 힘들어서 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나는 엄마가 자살하거나 집을 나가는 악몽을 꿨다.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길 기도했다. 그게 엄마를 위해서였는지 나를 위해서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는 점차 회복세를 보였다. 엄마는 나더러 신경을 써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내게 못 해준 것이 너무 많아 후회스럽다고도 했다.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지만, 괘념치 말고 건강하게 지내라고만 했다. 엄마와 나는 곧 외조부모님 댁을 나왔다. 그때 나는 엄마가 직장을 옮겨서 우리가 이사하는 것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순전히 나를 위한 결정인 것을 알겠다. 그건 엄마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엄마의 그런 사랑을 비로소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너무 늦지 말고 돌아오고.”
“알았어어.”
난 거북이처럼 두둑한 배낭을 메고 현관에 섰다. 이제 고3이 코 앞이다 보니 억지로나마 공부를 했다. 졸업하면 곧장 취직할 건지 대학에 갈 것인지는 못 정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노력하는 건 진장미 때문이었다. 장미는 날 어떻게든 수능을 치게 만들고 싶은 눈치였다. 매일 몇 페이지씩을 풀어오라고 숙제를 내주고 그걸 검사하기까지 했다. 진장미는 나쁘지 않은 선생이었다. 지금껏 더러운 성격인 줄만 알았는데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명쾌한 논리력까지 선생으로서 부족한 점이 없었다.
엄마는 신발장 끝에 있는 새 운동화를 가리켰다. 나로서는 언제인지 모르게 생긴 물건이었다.
“네 분홍색 운동화 신어.”
“이거 내 운동화야? 엄마 거 아니고?”
“너 신으라고 샀는데 네 운동화지. 그거 엄마 취향 아냐.”
지금까지 네댓 번은 신었지만 몰랐다. 당연히 엄마 걸 빌려 신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나는 표정이 밝아지는 걸 감출 수가 없었다. 집안에 내 것이 있다는 게 기분 좋았다. 유명 브랜드도 아니고 특출나게 예쁘지도 않지만 이건 나만의 것이다.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여섯 계단을 올라 지상으로 간다. 기분이 좋은 날에 보면 복잡한 골목길이 나를 위해 준비된 미로처럼 느껴졌다. 우리 반 중에서 누구를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이곳에서 길을 가장 잘 찾을 사람은 나였다. 미로의 좋은 점은 언제나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도서관 앞에서는 장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예전부터 특별한 인사 없이 고개만 까딱하는 제스처로 인사를 대신했다. 장미는 중학생 때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 그때의 장미는 교복보다 학교 체육복을 입는 날이 더 많았다. 지금의 장미는 언뜻 보면 성인으로 보일 정도로 성숙했다. 장미는 쭉 뻗은 다리에 어울리는 슬랙스에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왜 맨날 도서관에서 보자는 거야?”
“너 여기 식당이 얼마나 싸고 맛있는 줄 몰라서 그래.”
“야, 그러지 말고 다음엔 우리 집 와. 아빠 퇴근하기 전에만 가면 돼.”
장미는 아빠와 함께 산 지 1년이 지났다고 했다. 장미의 어머니는 다른 아저씨를 만나 재혼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다. 장미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가정사를 말해주었다. 반면에 나는 며칠 전에서야 작년에 장미에게 피구공을 던졌던 일을 사과했다. 장미는 드물게 큰 소리를 냈다.
“김소선. 그걸 이제 사과해? 난 네가 일부러 그런 줄 알았어.”
“내가 왜 일부러 그래.”
“아니, 공에 감정이 담겨 있었다고.”
“진짜 아냐. 미안해.”
장미는 “내가 봐준다.” 하고 넘겨주었다. 사실 그때 그걸 빌미로 말을 걸어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 조금 상처였다나. 나는 두 배로 미안해졌다.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무조건 장미에게 보고하기로 약속하고서야 장미는 나를 놓아주었다.
조금 지나 은혜가 왔다. 은혜의 패션 센스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무릎까지 오는 데다 굽이 12cm는 되어 보이는 부츠를 보고 있자니 발목 안 부러지냐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언니들~!”
“넌 제일 어린 애가 제일 늦냐?”
“아, 꼰대! 진짜!”
은혜는 알고 보니 은원만큼 순했다. 은혜는 잠시 친척 집에서 머무는 중이라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본 은원의 부모는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래도 그 이후로 무언가 달라진 게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은혜에게 자신들을 만나기 싫으면 그러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나. 확실히 은혜는 우리가 은혜를 보러 쉼터로 찾아갔을 때와는 표정부터 달라져 있었다. 상처 입은 짐승 같았던 은혜가 이제 잘 관리된 강아지 같았다. 살이 좀 더 붙은 것도 같았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셋이 함께 만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처음에는 은혜가 하도 말썽을 부려 곤란했던 적도 많았는데, 나와 장미가 쥐잡듯이 잡으러 다니니 이제는 제법 말을 잘 들었다. 오합지졸이었던 우리가 지금은 나름대로 어울리는 콤비로 보였다. 우리는 함께 있을 때 은원의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다. 지나치게 무거운 분위기도, 또 가벼운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거 은원이가 좋아했는데.”
“지금 잘 있을까?”
“당연하지.”
“우리 언니거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은원을 그리워했다. 최근 자주 꺼내는 주제는 우리의 미래를 그리는 말이었다.
“나중에 우리 셋이 같이 사는 거 어때.”
“방만 따로 쓰면 돼.”
“왜~! 같이 쓰자~!”
“아니, 따로 써야지. 장미랑 쓰는 건 괜찮을 거 같긴 한데.”
“나도 너랑은 괜찮을 거 같은데, 은혜가 좀……”
“언니들 왜 나 따돌려? 장난해?”
은혜의 말을 듣고 크게 웃는다. 장미와 눈이 마주친다. 그럴 때면 나는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 살아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삶에 감사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