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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Oct 27. 2024

아버지 죽이기 (9)

프로메테우스

햇빛이 강해서 눈을 뜬 건 처음이었다. 반지하의 아침은 축축하고 어두운 데에 반해, 호텔에서 맞는 아침은 쾌적하고 산뜻했다. 실눈을 떴는데도 안구 전체로 햇빛이 꽉 들어차는 느낌이 생경했다. 한참을 눈이 부셔 뒹굴다가 문득 곁에 있던 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은원이 사라졌다. 이곳에 나를 두고. 마치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이별임을 감지했다. 아버지가 나를 두고 떠난 날에는 몇 번이고 부정하느라 외면했던 진실이, 은원이 나를 두고 떠나자 너무나도 잘 보였다. 은원은 잠시 외출하거나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다. 은원은 나를 떠났다.

나의 머리와 몸은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의미 없는 행동인 줄을 알면서도 호텔 방을 하염없이 서성거렸다. 테이블 위에 못 보던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전에 사우나에서 챙긴 종이가 남아 있던 걸까. 종이를 들어 올리자 그것이 곧 편지임을 알 수 있었다. 은원이 나를 위해 쓴 편지였다.


소선에게

소선아. 멋대로 사라져서 미안해. 많이 놀랐겠다.

나 나름대로 많이 생각해보고 내린 결정이야.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날 너무 미워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 너를 정말로 아끼거든. 너한테 미움받기 싫어서 그래.

마음 같아서는 정말 언제까지나 네 곁에 있고 싶었어. 그럴 수 없어서 아쉽다. 만난 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너와는 안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 우리가 닮은 점이 많기 때문일까? 어쩌면 장미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너는 부정할지도 모르겠지만, 너랑 장미는 많이 닮았더라. 내가 좋아하는 장미의 모습 중에 많은 부분이 너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어. 두 사람이 예전에 얼마나 친했는지 짐작이 가더라. 한편으로 조금 질투가 나기도 했고. 나도 너희를 조금 더 빨리 만났다면 무언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우리 정말 잘 맞았을 텐데. 삼총사처럼 말이야. 그치?

어제 장미가 말해줬잖아. 날 이곳으로 이끈 건 강한 염원이라고.

넌 그게 너 때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 나는 죽는 순간까지도 조금만 더 살고 싶었거든.

정확히는, 나는 내가 무언가를 사랑해도 괜찮은지 알고 싶었어. 왜냐면 내가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건 반드시 망가졌으니까. 예외는 없었어. 어릴 때 가장 아끼던 인형도 엄마가 태워버렸고, 쉴 때 TV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집에서는 TV를 없애 버렸어. 그리고 은혜도 가버렸지. 나는 그게 다 내 잘못인 줄 알았어. 나한테 저주라도 걸려 있는 줄 알았거든. 웃기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장미한테 고백하고 싶었어. 난 이제 죽었으니까, 그제야 내가 장미를 좋아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 한 번쯤은 꼭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너를 만나고 많은 걸 배웠어. 너한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면서, 사실 내가 더 위로받았던 것 같아. 나도 사랑할 자격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나는 원래부터 장미를 좋아해도 괜찮았던 거야. 나는 내 옆에 있는 걸 더 마음껏 사랑해도 괜찮았던 거야. 그건 네가 나한테 알려줬지.

그러니까, 내 염원은 네 덕분에 이뤄졌어.

난 앞으로도 사랑하면서 살아갈 거야.

이 편지가 네가 살아가는 데 있어 도움이 되면 좋겠다.

우리 언젠가 또 보자. 안녕.

P.s. 은혜를 부탁해도 될까? 걔를 마지막까지 지켜보지 못하는 거. 딱 그거 하나가 아쉬워서 그래.


나는 편지를 읽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당장은 편지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은원이 영영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 나서 괴로웠다. 내 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온몸의 뼈가 저릴 정도로 슬펐다. 나는 순수하게 애통하기만 했다. 불안과 공포는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에 느낄 만한 감정만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의 진동음이 울린다. 진장미다. 말한 대로 첫차를 타고 지금 도착한 모양이었다. 이전에 겪었던 상황처럼 익숙했다. 괴로워하는 나와 나를 걱정하는 진장미. 나는 15살 때 외삼촌의 방에서 진장미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진장미에게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전화를 받았다.

“자, 장미야아……. 흑.”

[김소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 지금 호텔 앞이야. 다 왔어.]

“은원이가 어, 없어……. 사라, 사라졌어.”

장미는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왔다. 산발이 된 머리나 거친 숨소리에서 그 애가 얼마나 이성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장미를 보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장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나는 거의 탈수가 올 정도로 울었고, 보다 못한 장미가 먼저 생수를 꺼내줄 정도였다. 흉한 꼴을 보였음에도 장미는 나를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있어서 슬픔을 견딜 수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끈을 놓지 못하고 은원을 찾아 헤매기도 하였으나, 끝내 은원이 어디 있는지는 찾을 수 없었다.

내가 편지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다. 아버지가 내게 남긴 상처도, 내가 아버지에게 남긴 상처도 분명 한 번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아버지의 시체가 발견된다면 경찰에 잡혀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다. 왜냐면 은원은 내게 내가 얼마나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 알려주었으니까. 나는 나를 억지로 꾸며내지도, 나를 감추지도 않을 것이다. 적어도 은원과 장미는 내 사정을 전부 안 뒤로도 날 똑같이 대해주었으니까.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견디면 반드시 즐거운 일이 생긴다. 은원과 함께했던 3일 동안 은원 때문에 힘든 일보다는 은원 덕분에 즐거웠던 일이 더 많았다. 은원이 내게 선물을 주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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