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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산 Oct 27. 2024

아버지 죽이기 (8)

에우리디케


장미에게 전화가 온 건 오후 10시가 다 되어서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은원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나를 말릴 틈도 없었다.

“여보세요.”

[번호 안 바뀌었네.]

“응.”

[하도 안 받아서 바꾼 줄 알았어.]

“…….”

[옆에 있는 거 이은원 맞아?]

“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여기까지 와서는 속이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나는 장미를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몇 년 전에 크게 다투기는 하였지만, 장미는 내게 오랜 기간 좋은 친구였으며 은원이 그를 사랑하고 있기까지 했으니까. 우리가 여기서 감정싸움을 해봤자 은원만 곤란해질 뿐이었다.

[너네 반응이며 장례식 얘기며 듣고 보니까 왜 몰랐나 싶더라. 학교에서는 미안. 네가 수상한 사람이랑 같이 있다고 생각해서 정체를 확인하려던 것뿐이었어.]

“응. 괜찮아. 별일 없어. 피도 멈췄어.“

내가 말한 게 아니었다. 은원이 말을 가로챈 것이다.

[지금 혹시 은원이니?]

“나야. 나 맞어.”

[낯설어서 그랬어.]

은원이 머쓱하다는 듯 웃는다. 걸걸한 아저씨 목소리라 그런 탓이었다. 나는 그게 은원의 목소리로 들린 지 오래였다.

[지금은 어디야?]

사실대로 말하면 장미가 놀랄 게 뻔한 일이었다. 슬쩍 은원의 눈치를 보고는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강릉.”

[강릉? 어쩌다가?]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놀란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반나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곳에 있을 줄은 몰랐으므로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돌아오는 게 어때? 그렇게 보여도 언제 시체로 돌아갈지 모르고…… 음.]

장미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본인이 듣는 앞에서 죽느니 뭐니 하는 게 찝찝했던 모양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딱 굳어버렸다.

은원이 영영 떠날지도 모른다니. 은원은 이미 죽어있는 상태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은원의 부모님도 알고 동생도 알고 좋아하는 사람도 알았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깊은 부분을 알게 될 줄은 몰랐다. 나 역시 장미에게 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들을 은원에게 모두 들켜버렸다. 은원은 머쓱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내가 옆에 있으면 얘기하기 좀 그런가?”

[아냐, 네 얘기잖아. 그렇지만 듣기 싫으면 안 할게. 이건 너희 일이기도 하고.]

“네가 상관해도 돼.”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나는 둘의 시선이 내게로 꽂히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주목을 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게 된다.

“그냥…… 예전부터 얼마든지 상관해도 됐어. 이 얘기 늦게 해서 미안하다. 난 내 얘기를 잘 못 해. 그 사실이 너한테 상처를 줄 수 있는지 몰랐어. 그냥 나 하나 지키려고 이기적으로 굴었어. 사실대로 털어놓으면 네가 나한테 정떨어질 줄 알았거든. 내가 너무…… 너무 내 생각만 했어. 미안해. 그냥 다 미안해.”

[괜찮아.]

횡설수설한 말이었는데도 장미는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았다. 장미가 울먹이는 것 같았다.

“그, 그리고 은원이가 너한테 할 말 있대. 학교 간 것도 너한테 할 말 전해주려고 간 거야.“

우리 얘기에 방심하고 있던 은원이 나를 흘겨봤다.

“김소선!”

“말을 해야 알지. 우리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갑자기 변태 만나가지고 편지 전해주지도 못했잖아.”

“그래도 그렇지. 난 얘기 안 할 거야.”

[뭔데 그래?]

내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잘 생각해. 얼굴 보고 고백할 수 있겠어? 그냥 지금 말하라고. 지금 아니면 언제 하게. 원래 오늘 하려고 했잖아. 여자가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은원의 표정 변화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곧 마음을 굳혔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장미야. 내가 널 많이, 진짜 많이…… 네 생각보다도 많이 좋아했다고.”

[어, 알아.]

“나 안 징그러워?”

[좋아하는 건데 뭐가 징그러워. 알고 있었어. 고마워.]

어쩐지 분위기가 간지러웠다. 듣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일어나려는데 은원이 나를 붙잡았다.

“미안. 지금 하기에 적절한 말은 아닌데. 나 너무 내 생각만 하지.”

[아냐.]

“미안……”

두 사람의 대화는 길어질 걱정을 한 게 무색하게도 담백하게 끝났다. 나는 내가 모르는 둘 사이의 일이 내 생각보다도 많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들어도 괜찮다니까 이야기할게. 은원이 너, 그 몸으로 오래 있지 못할 수도 있어.]

나는 끼어들었다.

“이대로 영영 지내면 안 돼?”

[안 돼, 이건 순전히 우연이야. 은원이의 강한 염원 때문에 생긴 사고라고. 억지로 붙들려둔 영혼이 이승에 오래 있을 수는 없어. 악귀가 되니까. 본래라면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사라져야 맞아.]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난 알 것 같아. 난 괜찮아. 아직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어.”

나는 불안한 눈으로 은원을 바라본다. 은원의 태도는 어딘가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있어 봐. 내가 그쪽으로 갈게.]

“괜찮아, 장미야.”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은원의 만류를 내가 끊었다.

[아냐, 갈게. 가서 대답하게 해줘.]

“응, 여기 강릉 오션 컨피던스 호텔이야.”

나는 재빠르게 주소를 말했다. 은원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짚었지만,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 장미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 걱정해줘서 고마워.”

[둘 다 내일 보자. 첫차 타고 바로 갈게.]

나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한참 바라보았다. 은원은 다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나는 그의 두툼하고 거친 손이 이제 아버지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시체의 것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둥근 얼굴의 여자애가 보였다. 은원이 아버지이기를 바랐으나, 한편으로 은원이 아버지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고마워.”

“내가 더 고맙지, 뭐.”

“내가 네 아버지로서 잘 생활했는지 모르겠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은원더러 내 아버지인 척을 해달라고 했다. 어쩌면 은원은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 줄 모르면서 자기 나름 이상적인 아버지 행세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노력해서 나와의 약속을 지켜준 사람도 은원이 처음이었다. 나는 은원에게 말로 표현 못 할 감정을 느꼈다. 가슴 속에 응어리져 울컥하고 튀어나올 것 같으면서도 차마 형태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아냐, 너 자체로 좋았어. 우리 아빠는 필요 없어. 난 네가 이은원이라서 좋았어.”

나는 아버지가 이미 내 마음속에서 떠난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안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멍청한 데다 싹수가 노랗고 빌어먹을 여자애. 내다 버려봤자 아무런 손해가 없는 여자애. 하지만 그런 여자애는 이제 없다. 아빠가 죽으면서 아빠가 알던 나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우리 아빠는 진작에 날 버렸거든……. 그니까, 우리 아빠는 날 안 사랑했던 것 같아. 사랑했더라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주진 않았나 봐. 그래서 난 아빠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어.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만큼 형편없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고……. 내, 내가 지금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네가 나보다 더 힘들 텐데.”

나는 누구의 앞에서도 이렇게 적나라하게 상처를 내보였던 적 없다. 그런데도 은원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나는 마음껏 사랑받고 싶었고 은원은 마음껏 사랑하고 싶었다. 은원은 신기할 정도로 내가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었다.

“아냐,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내가 보기에 넌 정말로 넌 사랑받을 자격 있어. 난 너 멋있다고 생각해. 그냥, 넌 내 고백 도와줬는데, 난 너희 부모님 이혼 못 도와줘서 미안해.“

나는 은원의 말을 믿고 싶었다. 포근한 침구에 누워 은원이 한 말을 오래도록 곱씹는다. 이 말을 가능한 한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있어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애라는 걸 인정받고 싶었다. 천천히 졸음이 덮쳐오는 것을 느낀다. 반쯤 잠긴 목소리로 은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넌 나한테 해준 게 너무 많아.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네가 이대로 죽으면 너무 슬플 거야…….”

나는 은원을 끌어안았다. 쿵, 쿵, 단 하나의 심장 소리가 울린다. 나의 것이다. 나는 은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중얼거린다.

“우리가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소선아, 괜찮아. 난 지금 행복해.”

그게 은원의 마지막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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