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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론 Feb 16. 2024

시어머니로만 보이지 않는다

‘시아버님이 항암치료를 시작하셨다.’

페이스북에 뜬 <과거의 오늘> 게시글에 나온 1년 전 오늘이었다. 그 해 가을에 일어났던 교통사고로 시아버님의 암이 갑작스럽게 발견되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했던 겨울이었다.


시아버님이 이미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더 나빠지지 않게만 하는 현상유지의 치료라고 했다. 초기에는 일주일 중 2일씩 병원에 가셨다. 경북에 사시는 두 분이 서울까지 오가는 건 힘드셨다. 그래서 방학 동안 일주일에 이틀씩 우리 집에 와 계셨다.


화요일마다 신랑이 시골에서 모셔오고 다음날 병원에 모셔다 드렸다. 나는 집에 오시면 드실 음식을 열심히 만들었다. 치료효과가 좋기 위해 체력이 중요한 시기였다. 몸무게가 줄어드시지 않도록 음식에 신경 썼다. 다행히 고루 맛있게 잘 드셨다. 조용하신 아버님이 아침에 병원에 가기 전 꼭 며느리를 찾아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난 절대 효부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지나친 희생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선에서 했다.


방학이 끝나가자 직접 모시고 와서 모셔다 드리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말씀드렸다. 다행히 이후 2주에 한 번씩 오시는 걸로 치료 간격이 늘어났다가 이제 한 달에 한 번씩만 치료받으시면 되었다. 새벽버스를 타고 오셔야 하는 두 분이 짠하다. 그나마 방학 동안 편히 병원에 다니시며 초기 치료에 집중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행히 의사는 많이 호전되어 간다고 했다.


암으로 인해 아버님에게 모든 시선과 일정이 맞춰진 때, 나는 자꾸 시어머니께 눈길이 갔다. 사실 아버님은 고집이 많으신 분이다. 자식들에게는 티를 안 내셨지만 시어머니께는 달랐다. 병원에 안 간다, 왜 그런 치료를 받아야 하냐, 왜 이리저리 돌아다니냐며 치료를 다 해야 하냐 등 너무나 힘드셨던 어머님이 내게 하신 하소연만 해도 한 트럭이다. 우리가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면 조용히 계시다가 시어머니께 또 고집스럽게 행동하셨다. 호전되는 아버님과 달리 어머니는 점점 힘들어하셨다.


전화를 드리면서 항상 아버님 상황을 여쭈어 보면 언제나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대체 왜 이리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다. 남들은 모른다 몰라. “

그러면서 그동안의 힘들었던 에피소드를 쏟아내신다. 심적으로 고단한 어머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시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환자이시니 매번 약과 보조식품까지 챙기시고 주의해야 할 것들을 지속적으로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무엇보다 말을 듣지 않는 아버님으로 답답해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내가 여자여서 그런 건지 남편은 나만큼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용돈을 아버님 통장으로 안 보내고 어머님 통장으로 직접 보냈다. 명절 때마다 하시는 어머님 말씀에 이 내성적인 며느리가 함께 맞장구치며 이야기한다. 난 정말 말없는 며느리였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어머님이 말로 토해내실 수 있는 작은 통로가 되어 드리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효부가 절대 아니다.


얼마 전 명절을 지내기 위해 출발하기 전 전화를 드렸다.

“얘, 내려오지 마라. 느이 아부지 코로나란다.”

알고 보니 며칠 전 아버님이 코로나에 걸리셨고 전화드린 당일 어머님도 증상이 시작되었다고 하셨다. 아이들과 급히 쌌던 짐을 내려놓았고 부산하게 준비했던 공기가 가라앉았다.


전화로도 증상이 심한 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상황으로 인해 못 내려가는 마음이 불편했다. 또 시어머님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님은 조금 나으신 상태이시고 어머님은 이제 감염되셨으니 명절 내내 힘드실 게 뻔하다. 그러면서도 끼니가 되면 손수 준비해서 챙겨야 한다. 내내 누워계시다가 밥때가 되어 힘들게 몸을 일으키실 모습이 상상되었다. 게다가 초하룻날부터  아픈 몸으로 밥이라니.


“안 되겠다. 뭐라도 해드려야 할 것 같아.”

바로 남편과 장 보러 가서 전을 부칠 거리와 불고기거리를 사 왔다. 불고기 양념을 해서 재워놓고 고기와 두부, 야채를 섞어 동그랑땡 재료를 준비했다.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내내 서서 음식을 만들었다. 불고기, 동그랑땡, 깻잎 전, 버섯전, 동태전, 육전 등을 차곡차곡 반찬통에 넣었다. 설 초하룻날이 너무 서글프게 음식을 해 드시는 건 안 하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여자로서 힘들 시어머님을 향한, 오로지 그 마음으로.


다음날, 그렇게 만든 음식과 미리 사놓았던 과일을 싣고 친정으로 향했다. 아이들을 내려놓고 남편과 바로 시댁으로 향했다. 명절은 명절이라 길이 막혀 평소보다 늦게 도착했다.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서 어머님 뵙고 음식을 드렸다. 코로나가 걸리신 아버님은 나가지 말라는 어머님을 무시하시고 오토바이 타고 나가셨다는 한숨 섞인 말씀과 함께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나는 시어머니를 뵐 때마다 여자로서의 삶을 동시에 떠오른다. 이건 나도 30년 가까이 결혼생활을 해본 결과일 것이다. 내가 비슷한 상황에서 힘들었던 경험이 어머님의 상황에 이입되어 더욱 애처로운 마음이 드는지도 모른다. 아직 동등하지 않는 예전의 모습이 시어머님 세대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아버님이 아프신 후 멈춰진 농사일로 이제 두 분은 집에만 계신다. 들로 일다니시던 분들이 집에만 계시려니 얼마나 답답하실까. 아버님도 조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는 이해로 그치니 가능한 일이다. 그 뒤치다꺼리는 옆의 사람 몫이니 이해하면서도 힘든 건 어머님이시다. 지난주에 못 갔던 시댁을 이번주로 미루어 다녀오려 한다.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바람 쐬러 가야겠다. 남편은 아버님 때문일지 모르지만 난 어머님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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