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임에서 오일파스텔화 그리기 연수를 진행했다. 화가의 작품을 모작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기로 한 날이다. 꽃이 있는 화병을 그리며 우리는 2시간 내내 자신에게 몰입하느라 어느 때보다 조용했지만 집중의 에너지로 꽉 차올랐다.
감성을 나누는 이 모임이 만들어진 지 햇수로 5년째 된다. 배우는 목적의 연수가 전혀 아니다. 자신을 꺼내고 이해하고 서로를 안아주는 모임이다. 무언가 역할로만 있었던 우리들이 오롯이 ‘나’로 만나는 자리였다. 그러다 각자의 호기심과 흥미로 나온 것들을 서로에게 나눈다. 나도 좋아하는 그림으로 재능과 마음을 나눈 것이다.
3년 전, 코로나로 힘들었던 시절, 우리는 화상회의 시스템으로도 만났다. 지금도 그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화상회의 화면에 가득했던 회원들의 모습. 각기 사각의 도형으로 서로 다른 공간에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연결되었음을 느꼈다. 모임이 끝난 후 무언가로 이어진 느낌이 선명해서 그림을 그렸었다.
모임이 끝나고 운영하시는 선생님께서 질문을 하셨다.
“우리들이 어떤 관계로 느껴지나요?”
다른 분들이 대답하는 동안 나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와의 인연을 붉은 실로 비유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런 것 같아요”
우리들의 인연이 가는 홍연 같아서 좋다고 했다. 만약 우리들의 인연이 굵은 동아줄이었다면 나 같은 사람은 그 굵기가 부담스럽고 버거워서 벌써 그만두고 말았을 거다. 가끔은 있는 듯 없는 듯 그냥 두어도 혼자만의 시간에 걸리적거리지 않고 내킬 때 그 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만남이어서 좋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로를 빠져나오는데 필요한 것은 가는 실로도 충분하다. 굵은 동아줄을 잡아보겠다고 버거운 굵기를 움켜쥐느라 손바닥에 굳은살이 생기고 쓰라림으로 지레 놓아 버릴 수도 있는 동아줄보다 설렁설렁 풀려 있어도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는 가는 실이 좋았다. 나를 끌고 가는 동아줄보다 내가 잡고 발을 떼는 가는 실이어서 좋았다.
최근 ‘인연’을 모티브로 영화가 있다. 성인이 되어 어렸을 때의 친구를 찾아가는 내용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이다.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전혀 모르는 사람 둘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옷깃만 스쳐도
8천 겁의 인연이 쌓였다는 뜻이거든.
불교 용어인 ’겁‘은 일정한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한 시간을 말한다. 본래 인도에서는 범천의 하루, 곧 인간계의 4억 3200만 년을 1겁이라고 한다. 그게 8천이나 되다니.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실제로 ‘인연’이라는 단어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 의미를 알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의미 있어진다고 말이다. 정말 타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말이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8천겁이 쌓였다는데 우리 모임은 얼마큼의 인연들이 쌓여서 모인 걸까.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도 치유하고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못하는 나만의 고민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가. 아마 지금 단톡방이 조용해보여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분위기만 느껴져도 말을 건네고 선물을 보내고 달려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의 ‘패스트 라이브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