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ii): 돈을 주지 않겠다고요?

by 지인

농협을 통해 농촌 일자리를 구하기 전, 여자 혼자 가는 거니 많은 검색을 했었다. 그러면서 농촌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은 비단 외국인 노동자에 한정된 게 아니고 그 곳에 일하러 온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걸 알았다. 혼자 온 여자는 더 위험도에 노출되어 있지만 불합리한 일에 남녀 차이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농협 중개라는 명확한 지침과 가이드라인이 없었다면 이 일을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화 <리틀포레스트>는 링가디움레비오사만 없지, 해리포터와 같은 환타지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사라진 감자들 사이로 옥수수 씨앗을 심었다. 한 봉지에 8만원. 25~30cm 간격으로 트랙터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한번에 2알씩 심으라고 했다. 장갑을 끼면 옥수수 씨앗을 3개 이상 집을 수 있으니 장갑을 벗으라고 했다.



오후 4시반이 넘었을 때, 농가주는 '000씨'라고 이름을 부르는 나와 역시 같은 날 농협 소개로 온, 역시 '000씨'라고 부르는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감자/옥수수밭 끝으로 불렀다.



남자는 농가주와 적절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할 말은 하지만 예의는 바르게, 그리고 적당하게 맞장구를 치면서도 소주를 마시라는 농장주에게 비굴하지 않게 거절할 줄도 아는 대화술을 가진 사람이었다. 시간 약속도 잘 지키고 트랙터도 금방 배워서 농가주가 좋아했다. 아직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지만, 좋은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밖에서 새는 바가지는 안에서도 샌다는데 하루에 몇 번씩 요동치는 농가주에 대처하는 방식을 보니 안팎으로 현명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이런 사람은 사회 생활도 잘해서 직장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과거의 나와는 달리 쓰러지지 않고 잘 지낼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두 달 동안 혼자 여행을 한댄다. 이런 사람도 직장 정치는 녹록치 않은건가.



나는 왜 안 불렀는지 모르겠다. 결국 테이핑을 하다가 피가 났는데도 아무 말 안하고 계속 박스를 정리하는 내 모습에 측은지심이 든건지, 그도 아니면 아침에 했던 아줌마 공격이 안 먹혀서 점심 먹고 다같이 쉬는 중에 어제 일하러 왔던 만19살 미국 남자애와 내가 "놀아났다"라고 했는데 내가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처음으로 반말로 소리지르며 "놀아나긴 누가 놀아나- 걔 19살인 거 몰라?"라고 내뱉어서 선을 넘는 헛소리를 하면 조목조목 따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인건지.



트랙터 사이로 저희들은 시키는 대로 했는데요 라는 남학생들의 목소리와, 저기 있는 저 할머니는 정신지체2급이라며 옥수수를 잘못 심어서 밭을 못 쓰게 되었으니 오늘 일은 여기까지며 돈을 줄 수 없다는 농가주의 고성방가가 들려왔다.



아이들은 양손을 앞에 묶고 고개를 떨궜다.

커플의 표정에는 분노가 일었다.



나는 예상했던 일들 중 하나라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작업 끝이라는 말에 신나서 시간을 확인했는데, 원래 작업 종료 시간 10분 전이라는 걸 알고 낙심했다. 숨이 턱턱 막혀서 어서 떠나고 싶어서 잘 됐다 싶었는데 고작 10분이라니. 그래도 이게 어디야.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농가주의 화풀이가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중간중간 들리는 말만 들어도 농가주 말이 억지라는 걸 나열할 수 있었다. 옥수수 씨앗의 가이드라인이 되는 트랙터 방향, 그리고 그 트랙터를 오후에 농가주가 고장낸 바람에 덩달아 비뚤어진 옥수수 줄. 트랙터 라인을 따라 심으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 잘못은 없었다. 농가주의 분노는 어제의 경찰 사건과 이어져 오늘 장갑을 벗지 않고 쪼그려 허리를 굽혀 옥수수를 심는 대신, 폭염에 지쳐 발로 흙을 덜어내 옥수수 씨앗을 심고 덮는 우리들의 "웃기는 행위"로 귀결된 것 뿐이었다.





10분 넘게 소리를 지르고 나자 행복해진 농가주는 우리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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