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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나 Apr 29. 2020

문이 열리는 소리

'글 쓰는 엄마'라는 새로운 여행

 냉장고 문을 연다. 갑상선 약을 먹기 위해서이다. 몇 년 전 호주에서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후에, 이제 내 일상에서 중요한 의식이다.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갑상선이라는 몸의 일부는 에너지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들었다. 갑상선의 반을 제거한 상태라서,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나의 에너지는 일상생활을 하기에 많이 부족하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 후에 약을 복용하지 않고 한 달간 상태를 지켜보자고 했었는데, 그 한 달은 끔찍했다. 집 앞에 잠깐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들어오면 낮잠을 3-4시간 자야 피곤이 풀렸다.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날 피곤하게 만드는 행위가 되어 버렸다. 다행히도 갑상선 약을 복용한 후에는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몬테네그로 부드바. 막다른 골목에서 발견했던 문. 마치 우리 인생 같다. 막다른 곳이라 생각했는데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때도 종종 있다.


지난 2년간의 세계 여행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내 머릿속에 엉겨있었던 기분이었는데 이제는 그 실타래들이 하나씩 내 머릿속에서 나와서 내 마음이 더 가벼워지고 있다. 글 쓰는 일이 마치 갑상선 약처럼 내 마음의 약이 되고 있다. 여행하면서 가장 소망했던 것 중에 하나는 바로 내가 비워지는 것이었다. 더 가지고, 더 움켜쥐려는 욕망에서 벗어나 비워내고 싶었다. 여행은 그걸 시작하게 했고, 이제 글쓰기가 그 자리를 대신해주고 있다. 내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내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이 나에게 소울 메이트의 역할이 되어주고 있다. 육아와 살림에 지친 밤에도 내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한 친구와 이야기하듯 그렇게 풀어내고 있다.


스페인 칼로데스모로 비치 입구


여행과 글쓰기라는 다르지만 또 비슷한 과정을 통해서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나게 된다. 30대 후반인 지금도 여전히 나를 알아가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사실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도 날 알아가는 과정이지 않을까 싶지만 말이다. 글쓰기를 하면 할수록 내 부족한 모습을 직면하게 되고, 때론 다른 글들과 비교로 이어지면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 부족함을 타인에게 들키는 건 쑥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불편한 감정보다 더 중요한 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꿈을 계속 따라가는 거다. 디지털 노마드 가족이라는 낯선 개념에 대해서 혹시나 궁금해할 사람들을 위해, 육아에 지쳐 일상이 버거운 엄마들을 위해, 세계 여행의 꿈을 꾸고 있는 예비 여행자들을 위해, 그리고 아직은 어려 기억하지 못할 아들을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두려움이 없어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두려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작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되었거나 올바른 선택이 아닌 것이 아니다. 때론 아니 자주, 두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과 싸워야 할 때가 있다. 그 싸움에서 완벽한 승리를 얻어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두려움보다 더 큰 마음이 있기에 시작할 수 있는 거다.


몬테네그로 부드바 올드타운 길거리


'글 쓰는 엄마'라는 새로운 일상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둘째 아기가 잠든 시간을 기다려 아기 옆에서 핸드폰으로 글을 쓴다. 아기가 언제 다시 깰지 모르기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쓰지도 못한다. 모유 수유하면서도 글을 쓰고, 아이디어를 생각한다. 때론 잠도 못 자고 이렇게 매달리는 나를 보면서 이런 열정이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다. 열정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시간이 길었기에 잠을 못 자 피곤하면서도 그 고단함이 마냥 버겁지만은 않다. 옛 기억에 미소를 짓기도, 아픈 기억에 눈물을 지으면서 글을 써내려 간다. 솔직히 글을 쓰는 게 좋기도 싫기도 하다. 벌거벗겨진 기분이기도 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기도 하다. 앞으로 받을 수도 있는 비난이 걱정되기도 하고, 이런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음에 마음 깊이 감사하기도 하다. 확실한 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그 경험이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용기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심장이 빨라진다는 거다.


몬테네그로 페라스트 (Perast)에서 걷다가 찍은 사진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게 내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일이다. 대학 시절, 한비야 씨의 강연을 직접 들으며 그녀의 말처럼 가슴이 뛰는 일을 하고 살고 싶었다. 한 번의 기회만 허락되는 이 삶에서, 뜨거운 가슴을 유지하며 살고 싶었다. 장기 세계 여행이 나에게 그런 도전이었고, 글쓰기 또한 새로운 도전이다. 세계 여행을 하고 난 뒤, 절대 후회하지 않은 결정이자 다시 하고 싶은 일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글쓰기도 나에게 그런 도전이길 바란다.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귀 담아 들었다. 불가능하다고 나조차 부정적일 때도 조용하지만 끈질긴 그 작은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여 걷다 보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가 온다. 그 소리를 듣고 문 밖으로 나가느냐,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조금 더 머무느냐는 온전히 내 몫이다. 글을 올릴 때마다 그 문을 열고 나간다. 문고리를 붙잡고 망설일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나갈 용기가 생기는 건 두려움보다 조금 더 커진 열정의 크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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