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워 현실 감각이 없었다. 아산병원 무균실에 들어가 계신 아빠를 통유리 창 너머에서 바라보며 생각했다.
'곧 괜찮아지시겠지...'
오산이었다. 아빠는 반백년도 살지 못하고 그토록 잡고 싶었던 딸 손도 잡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항암치료가 끝나자마자 간병을 시작해 두건을 두른 아내와 대학교 3학년 딸 그리고 대학교 1학년인 아들을 남겨두고.
간호사 선생님께 울면서 딱 한 번만 들어가서 아빠 손만 잡게 해달라고 떼를 쓸 걸 그랬나. 그 순간이 늘 멍울로 남아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아빠의 생각이 궁금하고 의견을 묻고 싶을 때가 많아진다. 크고 작은 고비마다 혜안을 주셨던 아빠. 이제 그 어떤 말도 청할 수 없어 아쉽다.
개정 전 한국 나이로 소띠 마흔 살이다. 만 39세. 마흔이라는 숫자를 생각하면 '암'이 따라붙는다. 엄마는 완치되셨지만 40대 초반에 난소암이셨고 아빠는 40대 중반에 급성 백혈병으로 돌아가셨다. 양가 조부모님 중 외할머니가 아직 살아계시긴 하지만 폐암, 담낭암 등으로 돌아가셨기에 늘 건강에 자신이 없다.
요 근래 십이지장궤양과 용종절제술로 대장에 집게 3개를 집고 누워서 아직은 어린 두 아들을 바라보다 문득 '마흔'이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직 죽음이 드리우지는 않았지만 인간은 언젠가 생을 다하는 날이 오고야 마니까, 조금 이른 유서를 매주 써보자고 말이다.
아들아, 로 시작하는 편지 같은 유서에살면서 있었던 일 그때마다 아쉬웠던 처신들과 지금도 매일 배우고 성장하며 하루하루 살아내는 나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차곡차곡 쌓아두면 언젠가 내가 없는 이 세상에서 아주 가끔 엄마가 그리울 때 이 글들이 위로가 되지 않을까?
대학교 1학년 때 기숙사로 보내온 아빠의 마지막 편지. 보면 눈물이 나서 어느 순간 깊이 넣어뒀는데 유서를 쓰기로 결심하고 추억 상자를 열었다.
무려 네 장의 긴긴 편지 모서리마다 '정' '예' '슬' 이름을 써두셨다. 왜 이제야 알았지? 하나하나 다 새롭고 귀퉁이에 새겨진 아빠의 사랑이 그립다. 편지 마지막에는 교회와 십자가를 그려두셨다. 결혼한 후로 부모님 따라 절에 다니시고 지금도 사천 백천사 납골당에 계시지만, 총각 때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셨다고 들었다.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도 계셨다고... 지금보니 아빠 그림 솜씨도 썩 좋으셨네...
세월이 약인지 이제는 조금 편안하게 아빠의 편지를 대할 수 있나보다. 그 와중에 "애교가 모자라 곁을 떠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라는 구절에서 혼자 웃었다.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아서 참았다가 엄마가 눈시울을 붉힌 모습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마셨다는 아빠의 글을 읽으며 많은 사랑 주신 부모님 덕에 행복한 유년 생활을 보냈구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추억상자를 보니 친정 엄마가 써주신 편지가 특히 많다. 메모지, 편지지, 포스트잇 가리지 않고 참 많이 써주셨다. 나는 아들들에게 아들이라는 이유로 다정하지 못했던 거 같아 미안하다. 앞으로 이 유서가 따뜻한 편지로 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