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거나 좋으니 책을 사라.
사서 방에 쌓아 두면 독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 미국 문학가 제세 리 베네트
책을 쌓아 두고 바라보는 것을 적독(積讀)이라 한다. 그동안 나는 책을 사놓고 읽지 않는 것을 한심하게 여겼다. 다 읽지도 않았는데 새 책을 또 사들일 때면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적독으로 지적 능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호주 국립대 사회학과, 미국 네바다대 응용통계학과와 국제 통계 센터 공동연구진이 시험을 앞둔 성인남녀 16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이다. 그들에게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집에 책이 얼마나 있었는지 등을 묻는 환경 설문 조사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책이 많았던 집에서 자란 성인들의 언어, 수학, 컴퓨터 활용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밝혀졌다. 학창시절 학업성취도 또한 집안의 장서의 규모와 정비례함이 확인된 것이다. 대개 책의 양은 80~350권 이상이어야 학업 성취도에 영향을 미치며, 그 책을 모두 읽지 않고 그냥 책이 많이 있었다는 기억만으로도 인지 능력이 향상되었다.
가수 이적의 엄마이자 세 아들을 서울대에 보낸 것으로 유명한 여성학자 박혜란님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한창 아이들이 자랄 때 거실 가득 책을 쌓아두고 마음 가는대로 읽거나 놀게 하셨다는 것이다. 책을 책장에 꽂아두는 것과 테이블이나 바닥 등에 아무렇게나 놓아 둔 것이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잘 읽지 않는 책을 처분하기 위해 거실 한쪽에 쌓아두었다. 그런데 그 책을 둘러싸고 두 아이가 구석자리에서 쌓아둔 책들을 한 권 한 권 꺼내어 읽는 것이다. 책꽂이에 있을 때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책인데. 그 때부터 아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 있으면, 방이나 거실 한 쪽에 조금씩 쌓아두었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그 책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책장 가득 책을 꽂아 두는 것을 넘어서 거실 테이블, 침대 옆 협탁, 식탁 등 곳곳에 책을 쌓아 두기 시작했다. 책을 쌓아두는 것에 엄청난 명분이 생긴 것이다. 책장에 꽂혀 있을 때는 거기 가서 책을 골라 와야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저기 책을 두니 그냥 손닿는 대로 책을 읽게 되었다. 물을 마시다가도 화장실에 가서도 스윽 펼쳐본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소파에 앉았다가 옆에 책이 쌓여 있으니 자연스럽게 읽기 시작한다.
또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하지현씨도 언제어디서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집안 곳곳에 책을 세팅해 둔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소파에서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나 소설을, 화장실에는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이미 읽었던 책을 두는 것이다. 연구실에는 전공 서적을 둠으로써 책의 주제에 따라 장소를 다르게 한다.
책은 이렇게 손닿는 곳에 있어야 한다. TV 리모컨은 멀리 두어도 어떻게든 가져와서 본다. 그러나 책은 멀리 있으면 읽기가 쉽지 않다. 최대한 가까운 곳에 언제든 눈길 가는 곳에 있어야 자주 읽게 된다. 아무리 책이 많아도 TV가 종일 켜져 있다면 꽝이다. 독서의 시작은 분위기 조성에서 시작된다. 독서 습관을 기르고 싶다면 집안 곳곳에 책을 놓아둔 상태에서 TV는 잠시 꺼두자. 그리고 손닿는 모든 곳이 책장이라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책을 놓아두자. 책이 쌓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책과 함께 어지러이 노니는 삶을 기꺼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김영하 작가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했다.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다.”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또 다른 책을 사고야 마는 나로서는 굉장히 신선하고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소장하고 있는 책은 당장에 읽지 않더라도 언젠가 읽게 된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옆에 쌓아두자. 자주 눈도장을 찍다 보면 언젠가 손을 뻗어 만나게 될 날이 온다.
▶ 내 마음의 안식처
대체로 아이를 키우는 집에 가 보면 엄마 책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나도 아이들이 어릴 때 전집으로 책장을 꽉꽉 채우다보니 내 책들은 자리를 내줘야만 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손때 묻은 그 책들이 그립다. 그 속에 잔뜩 그은 밑줄과 메모들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버린 것만 같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내 책들을 웬만해선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이제는 아이들 책 보다 더 많아져 책장을 새로 들여야 할 지경이다.
집안 곳곳에 책을 놓아두는 것도 좋지만 메인이 되는 책장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다. 나의 경우 아이들과 내 책을 분리했다. 거실에 커다란 책상과 아이들 책을 꽂은 책장이 있다. 그리고 작은 방 하나를 남편과 나의 서재로 삼고 책장을 나눠 사용하고 있다. 책을 정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제별로 꽂았을 때가 가장 보기 좋았다. 발표할 일이 생기면 같은 칸에 꽂아둔 스피치 책들을 보고, 기분이 처지거나 마음이 슬플 때는 자존감 관련 에세이나 심리학 서적을 꽂아둔 칸을 살핀다.
학창 시절 한 선생님께서 “공부하다 책을 베고 잠들어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깨어나서 공부를 하라는 말씀이셨겠지. 편하게 푸욱 자지 말고. 그 때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편하게 자느니 편하게 자고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공부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책으로 둘러진 공간 속에서 한 없이 책을 읽다 잠드는 것. 그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내가 공부를 이토록 좋아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그 땐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던 거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가득한 공간은 분명 내 마음의 안식처다. 누구에게나 그런 곳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공부방을 꾸며주고 책장 가득 전집을 꽂아 주듯 부모에게도 나만의 책장이 필요하다. 그 날 그 날 필요에 따라 안식과 지혜를 안겨줄 책들로 가득 채운 책장이! 책을 많이 읽지 못하더라도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집안 곳곳에 책을 놓아두어 어느 장소를 가도 손닿는 곳에 책이 있어야 한다. 책과 내가 이어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어쩌다 펼친 책의 한 페이지에서 하루의 고단함을 잊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문득 삶의 깨달음을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손닿는 모든 곳에 책이 함께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