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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Jun 27. 2022

퇴직금으로 경제적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

퇴직금으로 빨대 라인 만들기


8년 차 대리.

퇴직금 세후 3천만 원.


어떻게 써야 이 돈이 값질까. 퇴사는 상상처럼 통쾌하지도 연인과의 이별처럼 가슴 아프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아쉬웠고 퇴직금만큼은 이런저런 생활비로 증발하지 말아야 했다. 첫 아이를 낳고 예상치 못한 지출이 이어지면 심장이 조여왔다. 현금흐름의 중요성을 깨달은 나는 매달 돈이 나올 수 있는 투자처를 물색했다. 경매책을 집어 들었고, 투자 가치 있는 빌라 고르는 기준을 발견했다. 


<경매할 때 투자 가치 있는 빌라>


1. 대단지 아파트 정문과 마주 보고 있을 것.

 아파트를 기반으로 한 각종 편의시설에 대한 접근성이 높을 테니까.


2. 도로를 끼고 있을 것.

 도로와 접한 땅이 가치평가를 더 받을 수 있을 테니까.


3. 버스 및 지하철역과 가까울 것.

 교통이 편리해야 사람들이 살고자 할 테니까.      


내가 사는 동네는 가까운 곳에 대학교가 있었다. 잘만 고르면 유행하기 시작한 셰어하우스를 만들고 운영할 수 있을 것 같다. 경매 물건에서 조건에 맞는 것을 찾기 어려웠던 나는 네이버 부동산 매물을 꼼꼼히 검색했다. 셰어하우스를 운영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나를 상상했다.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다. 퇴사를 꿈꾸는 이들이 노하우를 전수해 달라며 강의를 요청한다. 역시 퇴사한 건 잘한 결정이었어.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까 집에서도 가까워야 했다. 책에서 제시한 기준과 나의 기준을 충족하는 물건을 발견했다. 심지어 삼천만 원으로 살 수 있는 반지하 빌라. 13평 투룸 빌라는 도로에 접해 있었고 바로 앞에 마을버스 정거장이 있었다. 빌라가 포함된 블록에는 오래된 주택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어떤 곳은 골목이 비좁아서 소방차가 진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경매책에서는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면 언젠가 재개발 이슈가 생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용한 동네에 아파트가 올라가는 환상이 AR(증강 현실)처럼 펼쳐졌다.

 

책을 읽고 아이 낳기를 결심한 나는 또 이렇게 책에서 읽은 얕은 지식으로 덜컥 부동산을 샀다.


문제점은 잔금을 치르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했다. 반지하 빌라는 지면에서 반쯤 아래에 위치하기 때문에 습기에 취약하다. 습기는 곰팡이를 만들고 바닥 벽지를 손상시킨다.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대학생들은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방을 구한다. 아무리 버스 장이 바로 앞에 있더라도 교통비까지 드는 곳에 방을 구하지 않는다. 서울에는 오래된 주택과 빌라들이 정말 많다. 개발 호재가 언제 실현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합이 설립되었다가도 해체되고, 개발이 추진되었다가도 정권이 바뀌면 원점으로 돌아간다.


상태가 노후한 탓에 집주인한테 500만 원만 깎아달라고 했다. 500만 원은 온전히 수리비에 쓰였다. 반지하 빌라의 치명적인 약점을 몰랐던 나는 바닥을 깨고 새로 깔아도 올라오는 곰팡이 앞에서 좌절했다. 무더운 여름날 집과 세컨드 하우스를 오가며 곰팡이를 닦았다. 반지하 전문 설비업체를 다시 섭외한 이후에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공사만 두 번 한 것이다.

 

셰어하우스는 무슨, 반지하 습기와의 전쟁에서 녹초가 된 나는 부동산에 세를 놓았다. 다행히 다복한 가족이 세입자로 들어왔다. 세입자는 반전세를 원했는데, 보증금을 받으니 대출 없이 딱 3천만 원만 그 집에 묶어둘 수 있었다. 월세는 매달 20만 원씩 월급처럼 들어왔다.


20만 원이면 한 달치 커피 값. 나는 믹스커피 마니아니까 이 돈을 모아 '라테 효과'*를 시연해 보. 큰돈은 아니지만 매달 들어오는 20만 원은 심리적 풍요 가져왔. 빌라를 매입한 지 6년이라는 기간이 지났으니,


20만 원 *12개월*6년=1440만 원

그동안 1천4백4십만 원의 현금흐름이 창출되었다.


3천만 원을 투자해서 연간 240만 원의 월세를 받았으니, 연간 수익률은 8%. 꽤 괜찮은 수익률이다.


고생해서 수리해 놓은 덕에 문제없이 먼저 임차인은 4년, 현재 임차인은 3년째 살고 있다. 중간에 세입자가 바뀌면서 전월세 비율에 조정이 있었지만 수익률에는 큰 차이가 없다. 아쉬운 부분은 반지하 특성상 전월세 금액을 올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보다 치명적인 약점은 매매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 세입자와의 재계약 시점마다 부동산에 전월세와 매 모두 타진해보지만, 매도 가능성이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가격이 올랐냐고? 반지하 빌라는 아파처럼 최근 실거래가가 존재하지 않는. 다시 말해, 같은 유형의 매물이 최근에 얼마에 거래되었는지 사례가 없다. 따라서 팔리는 가격이 곧 시가가 된다. 그대로인지 올랐는지 혹은 내렸는지조차 매매가 이루어져야 알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퇴직금으로 아주 작은 파이프라인, 정확히는 빨대 라인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경제적 자유까지는 글쎄. 빌라를 매수한 이후 정부는 각종 부동산 규제를 쏟아냈다. 나의 13평 투룸 빌라조차 규제의 대상이 되었다. 부동산 가치에 비해 신경 써야 할 세금과 규제가 과도해서, 지금은 일단 이 빌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라테효과 : 매일 카페라테 한 잔의 돈을 절약하여 꾸준히 저축하면 목돈을 만들 수 있다는 경제 용어)


  




여성이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비자금이 필요하다.


지금은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화되어 배우자가 상대 배우자의 계좌를 관리하거나 부모가 자녀의 자산을 관리하는 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 홈페이지, 앱을 통해 대부분의 은행 업무를 수 있기 때문에 가족에게 금융 거래를 맡길 필요도 현저히 줄었다.


내가 은행에 입사했을 때에는 주로 아내 또는 엄마가 홀은행에 방문하여 남편과 자녀 명의의 계좌를 관리하는 일이 흔했다. 개인정보보호법이 강화되면서 대리 업무에 제약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고객들에게 본인 명의의 자산을 조금씩 만드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었다. 편리한 업무처리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본인 명의 자산을 유함으로써 돈이 주는 안정감을 갖길 원했다.

 

은행원이었던 나는 편의상 가정의 자금 관리를 담당는데, 퇴사 후 주부의 세계에 들어오니 그것흔치 않은 경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없고 오지랖 넓은 젊은 엄마는 언니들에게 “생활비 외에 가사와 육아 노동에 대한 대가를 요구해서 개인의 비자금을 만들어요.”라고 조언했다. 아주 조금 철이 든 지금, 어쭙잖게 은행원 놀이를 하며 남의 가정사에 참견했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들이 본인의 자산을 보유하기를, 그로 인한 안정감을 맛보기를 바랐었다.

 

어느 날 남편이 동료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동료가 점심시간에 핸드폰 문자를 보며, “아니, 도대체 만 원짜리 붕어빵을 왜 자꾸 사 먹는 거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슨, 가정에서 살림을 담당하는 아내가 백화점 식품관에서 스무 개에 만 원하는 미니 붕어빵을 남편 카드로 결제했고 그 내역이 남편에게 핸드폰 문자로 전달된 것이다. 나는 왜 이런 이야기들이 불편한 걸까. 가정을 잘 꾸리기 위해 가사 노동에 기여하고 자녀 육아에 힘쓰면서도, 경제적으로도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중받기는 어려운 일인 것인가.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     


"여성이 픽션을 쓰려면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자기만의 방-




1929년에 출간된 <자기만의 방>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이다. 그는 이 책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힘으로 고정적인 수입을 얻고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셰익스피어와 같은 창조적인 여성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책에서 여성이 자산을 소유할 수 없는 까닭을 '보호받는 성'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여성은 '보호받는 성'이어서 스스로는 재산을 가질 수 없고, 정치에 참여할 수 없고, 주체적으로 공부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고 덧붙인다. 작가는 '100년이 지나면 이 가치들은 완전히 변'할 것이며, '여성이 보호받는 성이었을 때 관찰된 사실에 근거를 둔 모든 가설들은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과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예언대로 되었을까.


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으며, 주체적으로 공부할 수도 있다. 이상하게도 결혼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제적 능력과 관계없이 '보호받는 성'이었을 때 떠맡겨진 가사와 육아는 여전히 여성이 주로 맡는다.**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면? 가사와 육아는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않기에 여성은 다시 '보호받는 성', 능력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퇴사했지만 경제적 능력을 갖춘 독립된 성인이고 싶다.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고 가사를 전담하는 것이 수익을 창출하지는 않지만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일상에서 수없이 '너는 스스로는 능력이 없는 존재'라는 경직된 시선을 경험한다. 가정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을 누군가는 '집에서 논다'고 평가한다. 경제권을 가진 남편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매하고, 비싼 것을 살 때에는 허락을 받는다. 유모차를 끌고 커피숍에 가면 '맘충'이라고 손가락질받는다. '나는 가정의 행복을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다'고 위로하지만, 주변의 인정 없이 외로운 메아리로 사라지고 만다.  


울프가 말한 500파운드는 현재 한국돈으로 4000만 원 정도라고 한다(*유튜브 민음사TV). 그의 말처럼 고정적인 수입과 자기만의 방 있다면 나는 셰익스피어는 물론 그 어떤 존재도 될 수 있으리라. 퇴직금으로 매입한 빌라에서 작고 귀여운 현금흐름을 만들어 냈다. 경직된 가설로부터 나를 해방시키고 '스스로도 능력 있는 존재'가 되려면, 추가적인 현금흐름과 나만의 공간의 필요하다. 



**맞벌이 가구 여성의 평균 돌봄·가사 시간은 3시간 7분, 남성은 54분이다. 남편이 외벌이인 가구의 여성 돌봄·가사 시간은 5시간 41분, 남성은 53분이었고 아내가 외벌이인 가구의 돌봄·가사는 여성 2시간 36분, 남성 1시간 59분이다.  (출처: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 2022. 9. 6. 여성가족부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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