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습관 혹은 취미
20살 초반에 일본에 1년 정도 있었고 20대 후반에 새로 들어간 학부에서 일본어를 주전공했다. 3학년부터는 복수전공인 큐레이터과 공부에 열중하느라 일본어를 거의 놨다. 졸업 후 큐레이터로 일하게 되면서 일본어를 공부할 시간은 잘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아까움이 계속 있었다. 계속 갖고 있으면 좋을 것을 어딘가 내 팽개쳐버리는 기분이었다. 이런 찜찜함을 가지고 몇 년에 한 번씩 JLPT 시험을 보곤 했다. 작년에도 봤다. N1에 운 좋게 붙은 적도 있어서 그걸 볼까 하다가 N2를 봤다. 시험을 보는데 문제가 다 이해가 되고 잘 풀렸다. 신기했다. 이후 일본어를 어떻게든 계속 이어가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러다 우연히 매일 2페이지씩 일본어 책을 필사하는 모임을 만났다. 오프라인으로 진행되어 부담도 없었다. 첫 책은 마스다 미리의 얇은 만화 『す ー ちゃんの恋』였다. 만화여서 글자 수가 많지 않았다. 모임은 단톡방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해당 분량을 단톡방에 필사해 올렸다. 두 달 정도 진행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나는 평소보다 아침에 한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필사는 30분도 안 걸렸지만 필사를 마치고 단톡방에 올린 후 다른 공부를 조금 더 했다. 위 책 전체 필사를 마치고 현재는 같은 작가의 에세이 『今日も怒ってしまいました』필사를 시작했다.
최근엔 시나 미술 관련 에세이도 필사한다. 평소 나는 시 읽기를 어려워하는 편이다. 문장을 곱씹으며 완전히 몰두하고 상상하는 것이 잘 안 됐다. 내가 시구를 제대로 대하고 있지 못한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페이지를 들여다보다 책을 덮어버린다. 그런데 필사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시구를 좀 더 진득하게 대하는 기분이 든달까. 필사를 할 때는 시를 읽다가 금방 책장을 닫아버리지 않는다.
미술 에세이를 필사하게 된 것은 시각문화연구자 김신식 님의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시작되었다. 그는 씨네 21 편집위원 김혜리의 미술 에세이집 『그림과 그림자』를 필사하며 읽었다고 했다. 평소 김신식 님의 글을 좋아했던 나는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빌려다 필사를 해보았다. 글 몇 편을 골라 필사를 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책으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미술 에세이는 미술평론가 김진숙 님의 『인간다움의 순간들』이다. 미술을 막 공부하기 시작한 이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 중 하나이다. 나도 언젠간 저런 글을 쓰고 싶다.
일본어를 헐겁게나마 붙잡는 수단, 그냥 재미로 하고 있는 필사가 나의 일본어 실력, 글쓰기 실력에 어떤 효과를 가져다 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빈 시간이 생길 때면 뭘 좀 베껴써볼까~ 하는 마음이 든다. 해서 책장에만 꽂혀있던 어려운 시집도 들여다보게 되고 비슷한 류의 다른 책들도 탐색하게 된다. 필사 습관이 만들어지고 있나. 혹은 취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