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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열음 Nov 19. 2022

220923


     공기가 차가워졌다. 고개를 돌리면 하늘이 어두워졌다. 애써 외면했던 징조가 하나씩 모습을 구체화해서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추분이라고 했다. 아는 절기가 몇 없기 때문에 검색의 힘을 빌렸다. 추분 : 절기,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같은 문장을 뇌에 새길 듯 반복해서 읽다가 핸드폰을 넣었다.

여름이 끝났구나.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입안을 맴돌았다. 검지 끝을 살짝 갖다 대기만 해도 퍼석이며 바스라질 것 같았다. 다 관두자. 오늘 할 일이 하나 남아있었다. 뒤쪽 베란다로 나갔다. 일반 쓰레기 한 봉지와 넘칠 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차오른 분리수거 봉투가 보였다. 들고 나가기 쉽게 정리한 둘을 양손에 들었다. 양팔을 잡고 늘어져 나를 저 아래로 끌어당기는 무언가를 질질 끌고 나아가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바람이 차갑다. 겉옷을 입을 걸 그랬나. 후회는 가벼웠다. 분리수거를 하는 사이 몸이 데워질 것이었다. 그새 군청색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봤다. 색이 참 곱고, 차갑다. 어느새 하얀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언제, 어느 틈에. 궁금할 겨를도 없이 초록의 은행나무가 독백이라도 시작할 것처럼 하얀 가로등 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여름의 흔적이 남아있다. 눈부신 초록과 연두를 바라보다가 양손에 든 쓰레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곧 노랗게 물들어 바스라질 거야, 은행나무의 독백은 그렇게 시작됐을까. 그의 어조는 어떨까. 슬플까, 덤덤할까. 멜로디가 들어간다면 경쾌할까, 서글플까. 생각이, 쓸데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이대로 여름이 완전히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

가위질하듯 단호하게 고개를 내렸다. 내려놓았던 쓰레기의 좌우를 바꿔 다시 들었다.


     추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제껏 내가 외면했던 모든 사인이 추분 하나로 집결한다. 6시가 되기도 전에 군청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 코끝을 차게 식히는 공기, 바람에 힘없이 나부끼는 초록 잎. 여름이 끝났다. 오늘을 기점으로 낮이 짧아지면, 겨울이 온다. 겨울이 오는 것이다. 괜히 킁, 코를 먹었다. 목이 메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과 목 사이에 무언가 단단히 뭉쳐 둥근, 어쩌면 둥글지 않은, 덩어리를 이루고 자리를 잡은 것처럼, 먹먹하고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는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지. 또 한 번 코를 킁, 먹었다. 바보 같은 생각임을 상기한다. 숨을 깊이, 내가 마실 수 있는 최대로 들이마신 다음 숨을 잡았다가, 괜찮다. 낮이 짧아지고 나면 다시 밤이 짧아지는 날이 온다. 다시 천천히, 가늘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과 목 사이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긴 실 같은 숨을 타고 서서히 흩어진다.


     내일은 바다를 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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