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녀에게 정말 물려주어야 할 것
학생같은 앳된 목소리가 전화를 받으면 겁이 덜컥 난다. 기분이 나빠지거나 진땀을 빼거나. 둘 중 하나다.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는 다름아닌 장난 전화다. 새파랗게 어린 아이가 욕설을 찰지게 내뱉을 때는 기가 찬다. 비대면을 무기로 삼아 도가 지나친 장난들을 해도 뭐라고 꾸짖을 수도 없어 씁쓸하다. 한편, 진땀을 빼게 되는 건 그야말로 어려서다. 첫째,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거듭 설명을 해야 하고 둘째, 아직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줄 몰라서 후원의사가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우며 셋째, 후원의사가 있다 하더라도 미성년의 경우 부모님의 동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단계가 흥미롭다. 공을 들여 상담을 하고 겨우 후원할 의사까지 확인은 했는데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하면 열에 일곱은 난감해한다. 몇몇은 "부모님이 알면 전 죽어요. 그냥 모르게 하면 안돼요?"라고 사정까지 한다. 부모님과 상의해 본다던 아이들은 잔뜩 풀이 죽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엄마가 쓸데없는 거 하지말고 공부나 하래요." 우리나라에서 후원문화가 발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아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인 것이다.
그리하여 열 다섯 살 답지 않은 질문으로 대화를 리드해가는 이 어린친구에게 나는 무한한 호기심이 생겼다.
"후원금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사용되나요? 후원금이 올바르게 사용되었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지요?"설레이는 내 마음을 아는지 그는 프로후원러의 아우라를 마구 뿜어댄다. "제 용돈이 많지 않아요. 아껴쓰고 남은 돈으로 하고 싶은데. 꾸준히 하려면 큰 돈은 힘들거 같아요" 예의바르게 조곤조곤 말하면서 이것저것 꼼꼼하게 챙기는 모습이 어찌나 야무지던지 미혼인 나도 덥석 아들로 삼고 싶을 정도다. 그 나이에 나의 최대 관심사는 H.O.T의 방송 스케줄이었는데. 이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훨씬 넓고 깊구나. 속이 꽉 찬 밤톨처럼 똘똘하고 영민함이 엿보이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하지만 후원이 성사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제 아무리 본인이 하고 싶어도 부모님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니 말이다.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꽁무늬를 빼고 황급히 전화를 끊을 수도 있다.
"미성년의 경우에는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보호자에게 전화해도 괜찮을까요?"
"네. 그렇게 하세요."
그의 대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너무 당당하니까 오히려 질문을 한 내가 머쓱해졌다. 이 아이는 부모님이 자신의 뜻을 존중해주리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불화의 씨앗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부모와 자녀 사이의 단단한 신뢰가 느껴졌다. 내심 이런 아들을 둔 부모님은 어떤 분이실까 궁금하던 참에 잘 되었다 싶었다. 아이의 확신에서 이미 보호자의 동의는 받은 것과 같았기에 혹시 모를 반전을 염려하지는 않았다. 다만 형식적인 절차를 빌려 어머님과 대화해본다면 나의 호기심이 어떤 깨달음에 이르지 않을까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아드님이 대견스럽다는 칭찬에 어머님은 몹시 흐뭇해하신다. "호호호, 조기교육이 효과를 보네요!" 조기교육이라니?! 처음에는 내가 뭔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조기교육은 글로벌 인재양성을 위한 영어학습법에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어머님 말씀을 들어보니 아이 이름으로 어릴 때부터 1:1 결연을 맺고 결연아동과 친구처럼 편지를 교환하게 했다고 한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분위기였다. 지금까지는 이름만 후원자지 부모 돈을 쥐어주어서 했는데 중학생이 되었다고 본인이 용돈을 아낄 생각을 했다며 무척 기특해하신다. 내신등급이 올라간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어머님이 흡사 공익광고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과연 그 어머님에 그 아들이다. 경쟁이 미덕인 사회에서 남보다 무조건 '더 빨리, 더 높게'를 종용하는 우리들에게는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국,영,수 선행학습보다 더불어 나누어 사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머님의 교육철학이 새삼 대단해보인다. 어머님도 참 훌륭하시다고 했더니 수줍은 듯 묵직한 메세지를 남기신다.
물려줄 것이 이런거 밖에 없어서요
아이는 성공에 가깝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행복에 가까운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흔들리는 풍파속에서도 바른 선택을 하며 가능하면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다. 그의 선한 영향력이 인류를 지키는 한 줌의 온기가 될 것이다. 덕분에 지구별은 한층 영롱하게 빛날테고. 어쩌면 아이가 물려받은 것은 최고의 유산이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