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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리스 부인 Oct 02. 2022

겉절이

흰쌀밥만 있으면 된다.

먼지가 날리는 건설현장 모퉁이 가건물,  '함바집(현장 식당)'이라 불리는 수진의 식당이 있다. 

아이보리색 플라스틱 패널로 지어진 그곳에는, 일상과 사람, 그날의 이야기 그리고 하루를 버티게 해 주는 음식이 있다.


트럭에 실려있는 배추가 싱싱해 보여, 수진은 계획에 없던 겉절이를 담기로 했다. 

배추 열 통을 내렸다. 김여사가 배추를 네 등분으로 자른다. 꼭지 부분을 잘라내고 먹기 좋은 크기로 듬성듬성 자른다. 배추에 천일염을 뿌려 버무린다. 그 위에 연하게 만든 소금물을 붓고 반 시간 정도를 절인다. 

수진이 홍고추와 양파를 다지고 밥 한 주걱과 같이 믹서에 넣고 돌린다. 양념장에는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도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새우젓과 멸치 액젓으로 간을 맞춘다. 

중간중간 김여사가 절인 배추를 뒤적인다. 수진이 절인 배추 위에 양념을 뿌려 무쳐낸다. 중간중간 한 줌씩 섞어 넣은 부추가 잘 어울린다. 최여사가 통깨 두 줌을 골고루 흩뿌린다. 무쳐낸 겉절이가 배식통에 담긴다. 


김 씨라 불리는 잡역부는 항상 검은 야구 모자를 쓰고 다닌다. 인부들은 작업장을 벗어나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머리에서 안전모를 벗는 것이다. (안전모를 착용하면 무게도 무게지만 작업이 시작됐다는 긴장감이 들어 사람 어깨를 짓누르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한다. 반대로 근로자들은 안전모를 벗으면 홀가분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느낀다고 한다.) 식당에 들어오면 성격에 따라 벽에 마련해 놓은 안전모 걸이에 가지런히 거는 사람도 있고 던지듯이 바닥에 내려놓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김 씨는 식당 앞에 오기까지 안전모를 벗지 않는다. 식당 입구에서 안전모를 벗자마자 주머니에서 검은 모자를 꺼내 깊게 눌러쓴다.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은 조용한 성격이다. 주변의 몇몇 사람만 아는 일이지만, 얼마 전까지 유수의 공기업에서 꽤 높은 간부직까지 지낸 사람이라고 했다. 특출 난 기술은 없지만 자기가 맡은 일은 책임감 있게 해내는 편이다. 

< 건설 현장의 식당에서는 벽에 안전모를 걸어 놓을 수 있는 걸이대를 설치한 곳이 많다. >

김 씨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다. 하루 일이 끝나면 숙소로 잡아놓은 인근 고시원으로 바로 가곤 한다. 주말이 되어도 고시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는지, 금요일이 되면 플라스틱 통을 가져와 김치를 좀 담아가도 되냐고 부탁하기도 한다. 사람이 워낙 점잖아 보여, 여사님들이 김치 말고도 여러 가지 남는 반찬을 담아주려고도 했으나, 한 두 가지 반찬만 있으면 족하다고 하며 항상 정중하게 사양하곤 한다. 


수진이 반찬으로 겉절이를 내놨다.

겉절이가 나오는 날이면 김 씨는 흰쌀밥 말고는 다른 반찬을 하나도 담지 않는다.

"김 씨 아저씨, 오늘 고등어조림 맛있는데 안 떠가네?"

최여사가 아는 척을 한다. 김여사가 최여사의 옆구리를 살짝 찌른다. 

"놔둬, 김 씨는 겉절이가 나오면 다른 반찬은 입에 대지도 않아."


김 씨가 젓가락으로 겉절이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는다. 혀 끝부터 느껴진 양념 맛이 입 안 가득히 퍼진다.

매운, 달콤한, 짭짤한 맛이 어우러져 있다. 막 담근 배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삭함이 있다. 입안에 퍼지는 매콤함을 하얀 쌀밥으로 달랜다. 이번에는 겉절이에 부추를 얹어 크게 베어 문다.

다음에는 뜨거운 쌀밥 위에 겉절이를 하나 올려 입으로 가져간다. 밥과 겉절이뿐인 식사지만 평소보다 먹는 시간은 배나 더 걸린다.


김 씨는 자신이 항상 가족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과 늦은 술자리, 주말의 골프도, 다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전부를 바쳤다고 생각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가족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그들은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남은 밥에 비해 겉절이가 부족해 보여 최여사가 따로 앞접시에 겉절이만 담아 갖다 준다. 김 씨가 일어서서 모자를 벗으며 최여사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간 가족들과 같이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김 씨가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듯 말한다. 집에서 먹는 식사라고 해봐야 늦은 밤 술을 마신 뒤 느끼는 허기짐을 채우기 위해 아내가 정성을 들여 만들었지만 이미 식어버린 반찬과 국에 말은 밥을 말아 욱여넣듯이 먹는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김 씨가 겉절이 하나를 집어 눈높이까지 올려 응시한다.

"겉절이를 먹으면 기분이 참 좋아져요. 이런 말하기 좀 뭐하지만, 뭐랄까 아내가 음식을 요리하면서 맛을 보라고 하나 입에 넣어주는 맛이랄까요? "

김 씨는 다시 겉절이 하나를 입에 넣고 눈을 감는다.


"오늘 참 잘 먹었습니다."

만족한 표정의 김 씨가 수진에게 모자를 벗고 환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수진이 겉절이를 좀 싸줄 테니 가져가시겠냐고 묻자 정중하게 사양한다.


"겉절이는 방금 담가 뜨거운 밥 위에 있을 때 살아있는 음식이거든요."



@ 수진의 TIP

아삭 거리는 소리와 식감이 겉절이의 맛을 더 북돋는다. 소금에 절이는 시간이 너무 길면 김치의 숨이 죽어 아삭함이 줄어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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