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리스 부인 Oct 28. 2022

도토리묵무침

봄과 함께 찾아오는 알싸한 맛

먼지가 날리는 건설현장 모퉁이 가건물,  '함바집(현장 식당)'이라 불리는 수진의 식당이 있다. 

아이보리색 플라스틱 패널로 지어진 그곳에는 일상과 사람, 그날의 이야기 그리고 하루를 버티게 해 주는 음식이 있다.


봄이 왔다.

봄은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기분 좋은 계절이다. 반면 추운 겨울 동안 침체되었던 현장에 활기가 도는 일하기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조경 공사가 한창이다. 조경팀의 작업과 맞물려 현장 단지 내에 '차도 블록'을 까는 작업이 있다고 한다. '차도 블록'이라 하면 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겠지만, 다른 것이 아닌 보도 블록의 종류 중, 차도 다닐 수 있는 통로에 블록을 깐다는 말이다. 차도 블록에 쓰이는 블록은 인도에 까는 블록보다 더 단단하고 두꺼운 편이다. 그래서 무게도 다른 블록에 비해 좀 더 무거워서 인부들에게 부담이 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 블록 공정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꼼꼼하게 하지 않으면 얼마 못가 가라앉거나 튀어나오기도 한다.>

블록팀 사람들 중 눈에 띄는 근로자가 있다. 현장에서는 흔치 않은 중년의 여성 근로자다. 민자영 이라는 이름보다는 민 반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를 더 좋아하는 그녀이다. 그리 길지 않은 회색빛 머리칼은 하나로 단단히 묶여 있고, 목에는 핑크색 수건을 두르고 있다. 입고 있는 작은 사이즈의 남자 작업복도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다. 

현장에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참 곱게 나이 드신 분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다.


하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자기가 맡은 일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꼼꼼히 해내곤 한다. 여자라는, 나이 든 사람이라는 이유로 배려받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민 반장은 나름 블록 분야에서는 꽤 인정받는 기공이다. 이십 년이 넘게 일해 온 블록일로 슬하에 자녀 둘을 잘 키워냈다. 그 자녀들이 사회에서 나름 자리를 잡으면서 이제 일을 그만 두시라는 말도 숱하게 하지만 아직 자식의 도움을 받을 때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 민 반장이다.


인부들이 바닥을 정리하고 모래를 깐다. 몇몇이 바닥을 다져주는 간이 다짐기를 움직여 땅을 다진다. 가지런히 골라진 바닥 위에 민 반장이 블록을 깐다. 그저 조각 맞추듯 끼워 넣는 것처럼 보이지만 블록 하나를 바닥에 그냥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그 짧은 시간에 블록 사이의 간격과 수평, 높이까지 잘 맞게 깔아야 한다. 작업 중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대충 끼워넣기 식으로 깔아놓은 블록은 비라도 한 번 내리면 여기저기 주저앉고 튀어나와 처음부터 다시 재시공을 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민 반장이 조금 튀어나온 부분을 고무망치로 두들겨 균형을 잡는다. 오전에 예상한 작업보다는 좀 더디게 나가는 것 같지만, 민 반장이 하는 작업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없어 나중에 보면 다름 팀보다 더 일찍 끝나곤 한다. 

민반장이 무릎을 짚고 일어난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민 반장이지만 하루 종일 쪼그리고 작업하다 일어나니 무릎에서 '두두둑'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봄이 오면 수진은 도토리묵무침을 만든다. 

최여사가 야채를 손질한다. 양파는 납작하게 썰고, 오이는 반달 모양으로 썰어놓는다. 고추와 홍고추, 대파의 하얀 부분도 가지런히 썰어 손질해 놓는다.

수진이 양푼에 양조간장과 맛술을 넣고 고춧가루, 설탕, 다진 마늘을 넣어 잘 섞는다. 완성된 양념장은 통깨를 뿌리고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숙성시킨다.

김여사가 커다란 업소용 판 도토리묵을 자로 재듯이 가지런히 잘라 놓는다.

큰 양푼에 도토리묵과 손질된 야채를 넣고 그 위에 양념장을 따른다. 최여사가 상추 한 줌을 가위로 삼등분이 되게 잘라 넣는다. 

수진이 장갑을 낀 손으로 도토리묵을 버무리다 뭔가 생각난 듯 참기름 두 스푼을 넣고 다시 버무린다. 


점심시간이다.

오전 내내 거친 현장에서 남자들과 대등하게 일하던 민 반장이지만 수진의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쾌활한 중년 여성이 된다. 일터에선 과묵한 민 반장도 연배가 비슷한 최여사와 김여사를 만나면 마치 학교 수업 중 쉬는 시간에 만난 친구들처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눈다. 

다만, 수진은 항상 시어머니처럼 음식의 맛에 대해 대놓고 품평하는 민 반장의 말이 그리 편하지는 않다. 

민 반장이 식판에 도토리묵무침을 가득 담았다. 넓적한 묵을 반으로 잘라 입에 넣고 천천히 음미한다. 처음 한 번은 도토리묵만 먹고, 다음 번에는 상추 잎으로 묵을 싸서 먹어본다. 민 반장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민 반장의 남편도 블록 공이었다. 현장에서 사고로 허리를 다친 후 다시는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민 반장은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블록일을 대신하겠다고 나섰다. 가족들이 말렸지만 민 반장은 완고했다. 어린 자녀들을 키워야 하는 생활 수단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남편이 쓰러진 곳에서 다시 일어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수진은 민 반장의 삶이 도토리묵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한 없이 부드러운 도토리묵처럼, 당당한 블록 기공으로 현장의 거친 남자들에게도 지지 않은 성격이지만 그 속은 따스함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 민 반장이다.


민 반장이 식판을 퇴식구에 넣고 주방을 지나간다. 최여사와 김여사는 민반장이 수진에게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나 하고 긴장한다.

"수진 사장님, 오늘 참 맛있네 특히 도토리묵 양념이 참 잘됐더라." 

수진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린다. 뭔가 기대했던 최여사와 김여사의 얼굴은 조금 아쉬운 표정이다.

식당 문을 나서던 민 여사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돌아온다.  

"근데, 도토리묵에 참기름이 좀 너무 많이 들어간 거 같지 않아? 고춧가루는 좀 덜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최여사와 김여사가 손으로 웃음을 가리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수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 수진의 TIP

도토리묵을 무칠 때 양념을 너무 여러 번 버무리지 않는 것이 좋다. 양념장에 너무 절여진 야채는 아삭한 맛이 떨어진다.

이전 12화 보리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