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
보헤미론의 마지막은 표지에도 있는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먼저, 화엄종은 중국에서 시작된 종교로 신라시대(670년) 의상에 의해서 한국에 발원된 종교입니다.
본래 중국의 화엄경은 80권이고 이것을 의상이 공부해 당시 중국 스승인 지엄에게 대승장(大乘章) 10권을 짓고 잘못이 없는지를 문의했고 이에 지엄이 보고 난 뒤, 뜻은 좋으나 말이 너무 옹색하다 하여 다시 고쳐지으라 했다 합니다.
그리고 난 뒤, 지엄과 의상이 함께 불전에 나아가 그것을 불에 사르면서
"부처님의 뜻에 맞는 글자는 타지 않게 해 주소서."하고 기원을 하였더니 210자가 타지 않고 남았다고 합니다.
의상이 타지 않고 남은 글자를 주워 다시 불 속에 던졌으나 역시 또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엄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하여 칭찬하였고, 의상이 글자를 연결하여 불교시가 되게 하려고 며칠 동안을 문을 걸고 글자를 연결해 맞추어 마침내 30구를 이루니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의 오묘한 뜻을 포괄하고 세상만물의 이치를 설명하는 아름다운 불교 상형시가 되었다 합니다.
다소 신화적이고 과장된 얘기일 수 있지만, 실제 원문의 뜻을 보기 전에 배열과 구조를 보면 제작된 배경의 얘기가 아무 근거 없이 꾸며졌다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신비스럽고 마치 우리나라판 다빈치코드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얼마 전 이상의 오감도를 90년 만에 물리학적으로 해석했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화엄일승법계도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해석이 또 한 번 숨어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참고로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이 훨씬 전에 지은 시입니다.
첫머리에서 이것을 짓게 된 동기를, “이(理)에 의하고 교(敎)에 근거하여 간략한 반시(槃詩)를 만들어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함이다.”라고 밝히고,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의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저자명을 기록하지 않는다"
고 적었다고 합니다. 읽자마자 정말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서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드는 의문이 그러면 어떻게 이걸 지은이가 의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것인데,
관련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고 그에 대한 이야기가 의상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어서 화엄일승법계도의 저자가 의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 어렵고 방대한 화엄경 80권을 단 210자로 축약을 했으니, 그 축약된 내용 또한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우선 해석을 하기 전에 몇 가지 의상이 해 놓은 신기한 장치들을 먼저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화엄일승법계도를 말할 때 210자 54각으로 7언 30구의 게송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210자는 전체 한자수이고 54각이란?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동자가 만나서 깨달음을 얻는 스승이 53명인데, 마지막 스승이 처음 만난 스승과 반복되어 54명으로 카운트됩니다. 그래서 미로도 보면 시작한 것에서 다시 시작한 곳으로 돌아오는 나선형입니다.
여기서 54각이라는 것은 이 미로가 꺾이는 부분의 횟수입니다. 아래 그림을 보시면 정확하게 54번입니다.
7언 30구는 7개의 한자로 30줄로 이루어졌다고 보시면 되는데, 제가 잠시 후 2구씩 묶어서 15줄로 해석할 예정입니다.
54각 이외에 글자의 배치를 몇 가지 더 보면,
가운데 법자를 두고 좌로 性(성) 위로 衆(중) 우로 叵(파) 아래로 佛(불)을 위치한 것도 의도적인 것입니다.
법(法) 은 부처님이 가르치는 진리의 핵심으로 정 가운데 배치하고
性(성) 은, 心(마음)과 生(날/생) 이 결합해 인간의 타고난 심성을 뜻하고
衆(중)은, 중생 또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뜻합니다.
叵(파)는 어려울 파
佛 (불)은 진리 또는 가르침
글자를 이해하면, 생명체에 기듯 모든 근본은 어렵지만 진리의 핵심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각 네 귀퉁이에 중, 일, 사, 좌를 둔 것도 각 미로 구간의 주제어를 대표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중(中) 가운데를 뜻하지만, 승려로도 표현되고
일(一) 은 하나, 으뜸으로 화엄일승에서 쓰이듯이 하나로 귀결된다는 뜻
사(死) 은 죽음을 뜻하지만 불교에서는 윤회나 고통을 벗어나는 열반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좌(坐)는 앉다는 뜻으로 불교의 수행을 뜻해서
다시, 각 미로의 구간을 대표하는 주제로 보면
중(中) : 자신
일(一) : 깨달음
사(死) : 열반
좌(坐) : 수행
자신에 대한 깨달음, 열반으로 가는 수행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즉 화엄일승법계도 자체가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열반으로 가는 수행이라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법(法)으로 시작해 불(佛)로 끝나, 다시 법(法)으로 시작하는 구조는 불교사상에 대한 끊임없는 정신을 얘기한다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한자 자체가 우리가 아무리 해석을 해도 이해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요즘세상과 생각에 맞게 주관적으로 의역을 해보았습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대부분 직역이나 의역이 있지만,
저처럼 한글판 화엄일승법계도를 미로 따라 구현하면서 풀이를 쓴 것은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아시는 것과 다른 오역이 있다면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한 제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니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너무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최대한 종교적 색채를 내지 않게 작업해 보았습니다.
자, 보헤미론의 마지막 화엄론의 화엄일승법계도를 드디어 시작하겠습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7언 30구를 7언 2구씩 설명드리겠습니다.
1.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2. 無名無相絶一切 證知所知非餘境
3.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隨緣成
4.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1. 삶의 진리는 어디서든 관통해서 모든 곳에서 한결같이 존재한다
2. 무명 무상이며 그 깨달음으로 인생이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3. 참된 진리는 오묘해 불변의 본성을 갖지 않고 상황 따라 그때그때 바뀌는 것이다
4. 하나를 구성하는 여럿이 하나를 구성한다
==> 세상 어디든 다 통하는 진리를 터득한다고 인생 별반 달라지지 않는데 이유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추구되어 자신의 인생에만 적용된 그 깨달음이 사회적 전체 어떤 통용되는 원리가 아니기 때문에 물질적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는 행위가 되지 못한다 내가 곧 사회의 구성원이지만 나는 단지 나만의 정신적 깨달음을 갖은 한 개인일 뿐인 셈이다
5.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6.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7. 九世十世互相卽 仍不雜亂隔別成
5. 작은 먼지 속 세상에는 작은 먼지가 있다
6. 긴 세월은 찰나의 순간이 긴 세월이다
7. 과거 미래는 현재에 같이 존재하지만 각각의 독립된 구성이다
==> 우리가 지나온 과거 그리고 앞으로 만날 미래 모두 현재에 보는 것이지만 그 발생은 당시의 시간에 발원되어 그렇게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시간이지만 결국 매 순간의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 하나의 과거와 미래가 있는 동 시간의 인생을 산다
8. 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相共和
9.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10. 能入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11.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8. 깨달음의 시작이 곧 깨달음이고 삶과 죽음은 현재 안에 있는 것이다
9. 진리 자체는 한결같고 별다르게 구별되지 않으니 우리가 믿는 신도 결국 다 같은 분이다
10. 깨달음은 어떠한 혼란 속에서도 삶의 법칙을 관통할 수 있다
11. 진리의 깨달음의 비가 내리면 갖고 있는 크기의 그릇에 가득 담을 수 있다
==> 진리의 깨달음은 과정을 갖고 마침내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면 곧바로 현재가 과거 미래가 되는 것처럼 깨달음은 종교가 무엇이든 그 기쁨으로 한껏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쁨은 자신만이 느끼는 기쁨이다
12. 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13. 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14. 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15.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12. 깨달음은 부질없는 집착을 끊어야 비로소 얻어질 수 있다
13.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얻은 자유의 영혼은 진리의 근원을 실컷 유영한다
14. 깨달음의 충만함은 세상을 빛나고 지혜롭게 만든다
15. 마침내 도달하는 존재하지도 안 하지도 있지도 없지도 않은 삶
==> 문제는 깨달음을 얻고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지만 그 기쁨 또한 버려야 하는 집착이기에 그마저 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의 진리를 깨달아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된다.
아래는 원본 화엄일승법계도의 틀을 그대로 해서 현대판 한글해석으로 "삶"이라는 글자를 시작으로 다시 “삶”으로 끝나는 미로의 순서대로 읽어나갈 수 있게 직접 제가 만든 것입니다. 미로를 따라 읽으려면 다소 읽는 순서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천천히 차분하게 구절구절을 음미해 읽어나가면 1,500년 전의 천재 스님 의상의 다빈치코드를 정말 생생 하게 느껴보실 수 있습니다. 마침내 진리에 다가가 깨달음을 얻는 느낌!
위의 파란 화살표 같이 미로의 길을 따라 읽어나가셔야 합니다.
천천히 한번 길을 따라 읽어보시죠~
요약하자면
진리의 깨달음을 통해 인생의 대단한 변화는 없다. 왜냐하면 다양한 사람들에게 각자에 맞는 깨달음을 이뤄 자신의 인생만 즐거워질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하는 사회의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원리를 터득해 내가 무언가 물질적인 것을 얻어 낼 수 있는 그런 깨달음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 그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과거가 바뀌지도 미래가 엄청 변화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진리에 대한 탐구의 결심, 그 현재가 곧바로 미래가 되고 과거가 되어 정신적 깨달음과 변화를 갖고 올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으로 마침내 영혼의 자유를 얻지만 이마저도 벗어나야 하는 집착으로 확실히 모든 것을 버려야 삶의 참진리를 깨닫고 그게 바로 내가 소유한 인생도 아닌 내가 지나온 인생이 되는 것이다.
수십 수백 번을 읽고 또 읽어도 여전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ㅎㅎㅎ
잘 될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쉽게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길을 걸어갑니다. 구걸을 하는 거지를 보고 돈을 줍니다. 거지가 고맙다고 하고, 저는 그냥 웃으며 빈지갑을 넣습니다. 잠시 후 소매치기를 만났는데, 그저 빈지갑을 빼앗겼을 뿐입니다. 내가 좀 전에 거지한테 돈을 안 줬으면 그 돈은 소매치기한테 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방금 선행이 운명 같고 정말 잘했다 생각이 듭니다. 다음날,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거지가 구걸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몇 푼 주고 가려다가, 소매치기를 만난 어제 생각에 남은 돈을 그냥 다 주어 버립니다. 하지만 오늘은 소매치기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사실, 소매치기는 어제 이후로 제가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거지에게 많은 돈을 준 것을 알고 거지의 동냥 그릇을 훔쳐 달아납니다. 저녁에 울고 있는 거지를 만나 지금 사정얘기를 들었습니다.
거지에게 괜히 많은 돈을 준 자신을 생각합니다. 나 때문에 거지가 당했구나, 아니지, 아니면 내가 당하는 걸 거지가 대신당한 거였나?
자신에게 일어난 첫 번째 사건, 소매치기를 당했지만 돈을 잃지 않은 행운은 그저 좋은 선행을 통해 일어난 작은 사건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고민입니다. 어려운 거지를 도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실 이건 관계없는 사건을 연관 지어 답을 찾는 것입니다.
깨달았다고 생각한 순간, 그건 단지 인과 관계를 이은 것뿐입니다. 깨달음은 무언가 인생의 변화를 주고 사건의 영향을 주고 다른 내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파악하는 것뿐입니다. 참 많은 일이 스쳐 지나갑니다. 내가 걸어왔던 우연과 필연의 사건과 지금도 의문인 여러 가지 일들, 그리고 그 영향을 받아 바뀐 현재들, 그리고 기대하는 미래
마침내 생각을 정리하고 누구의 인생도 아닌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만이 해야 할 선택들을 고민하는 것이 내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누구를 도울 수도 있고, 나로 인해 누가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다 내 인생에 일어나는 일로 나는 그때그때 바른 선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순간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내 인생은 그렇게 내 인생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 역시 누군가 무언가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는 존재니까요. 이런 삶의 연결과 고리 같은 집착을 놓아야 진정 내 인생이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집니다.
마지막 사례가 화엄론의 이해가 조금이나마 되었길 바라며
그간 1년 가깝게 써내려 온 보헤미론의 연재를 이렇게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위에 사진들은 본 글과 사찰에 기증을 위해 실제 작업한 사진들입니다.
인연으로 생겨나는 일체의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 있지 않다고 되뇌며 제 모든 글들은 출처 없이 아무 곳이든 게재하셔도 괜찮습니다.
이상으로 총 30편 보헤미론의 연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읽어주신 모든 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